[농가월령가] 기후위기 속 포도의 미래
윤홍기 충남농업기술원 스마트농업연구과 디지털과수팀장
포도는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대표적인 과수로, 약 2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 이후 살아남은 종이 오늘날의 와인 포도로 이어졌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문명을 거치며 포도와 와인은 귀족과 성직자의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고 서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무렵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마스캇 오브 알렉산드리아’ 같은 고대 품종이 지금도 세계적으로 재배될 만큼 포도는 오랜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경 창세기에도 등장할 정도로 인류와 밀접하게 연결된 포도는 단순한 과실을 넘어 문명과 함께 발전해 왔다.
근대 이후 신대륙 개척과 함께 포도는 멕시코, 칠레, 미국 캘리포니아 등지로 옮겨 심어지며 세계적인 산업 기반을 다졌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34종, 1만 4000여 품종이 존재하며 최근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끄는 ‘샤인머스캣’을 비롯해 다양한 품종이 각국의 기후와 문화 속에서 재배되고 있다. 포도는 생과일뿐 아니라 건포도, 주스, 와인, 브랜디 등으로 가공되며 농업을 넘어 관광·문화 산업으로 확장되는 특징을 갖는다. 국내 포도 산업은 주로 생과용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나 세계적으로는 전체 포도 생산량의 12%를 차지한다. 국내 포도 산업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이후 재배 면적이 감소했지만 샤인머스켓 도입으로 한차례 부흥기를 맞았으나 최근 소비 감소와 가격 하락으로 다시 새로운 포도 산업 활로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처럼 인류 역사 속에서 오랜 문화적 전통을 이어온 포도가 기후변화라는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포도는 평균기온 12~22℃, 연 강우량 600~800㎜라는 제한된 기후 조건에서만 잘 자라는 작목인데, 1850년 이후 지구 평균기온은 약 1.59℃ 상승했으며 2100년까지 최대 4.8℃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기온이 1도 오르면 수확 시기가 약 일주일 빨라지고 증산량이 20% 감소하며 잎의 기공 저항성이 크게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는 기후변화가 과실 품질 저하와 산업 위기를 동시에 불러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후변화의 영향은 전 세계 포도 주산지에서도 이미 확인되고 있다. 북반구 고위도 지역인 스웨덴이나 캐나다 등에서는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와인 생산이 가능해졌고 반대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같은 전통적인 와인 산지에서는 포도 품질이 저하되어 와인을 폐기하거나 공업용 알코올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는 곧 기후변화가 이미 산업 전반에 실질적 타격을 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여름철 고온과 일조 불균형으로 인해 착색 장애, 당도 저하, 저장성 악화 등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는 과실 품질 저하로 이어지고 수출 경쟁력 약화라는 구조적 문제까지 초래하고 있다.
이처럼 기후변화가 포도 산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단순히 농가의 소득 감소에 그치지 않고 국가 농업 경쟁력과 식량 안보, 나아가 농촌경제 전반에도 영향을 준다. 또한 관련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골든타임이 많이 남아 있지도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재배적으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물계절(phenology) 변화에 맞춘 작부체계 재정립과 기후변화에 대응한 품종의 도입이 시급하다. 또 개화기 수정과 결실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배 시기를 조정하고 잦은 강우로 인한 토양 유실 방지 대책을 강화하며 고온·저온 피해를 예측할 수 있는 기후예보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또한 기후변화에 맞춰 토양관리 방법을 재조정해야 하며, 특히 관수와 시비를 토양 미생물 활동 변화에 맞게 조절하는 기술적 대응이 요구된다.
앞으로는 고온 적응성에 맞춘 신품종 개발과 재식거리, 수형 관리 등 새로운 재배법 연구가 계속되어야 한다. 열과(과일쪼개짐)·일소(햇빛데임)과 같이 기후변화로 증가되는 생리장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도 강화해야 한다. 더불어 에너지 절감형 과원 개발, 돌발 병해충의 발생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 등도 농업 정책적 차원에서 지원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단순히 농가의 어려움 해소를 넘어 지속가능한 포도 산업을 지켜내는 토대가 될 것이다.
기후변화의 대책은 연구개발과 정책적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가와 소비자, 정부가 기후변화에 대한 심각성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기후위기 대응은 농민이나 정부만의 과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며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공동 대응만이 사회·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지속가능한 과수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