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칼럼-길을 걷다] 같은 극장, 저녁 7시, 같은 작품
연극 ‘대머리 여가수’ 68년간 공연 중
젊은 연출가 니콜라 바타이유(1926~2008)는 1950년 봄 프랑스 파리 소극장 녹탕뷜에서 생소한 연극 연출에 몰두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루마니아 출신 극작가 으젠 이오네스코(1909~1994)가 쓴 ‘대머리 여가수’였다. ‘반(反)연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오랜 세월 관객에게 익숙했던 사건 전개나 인물 성격 분석 위주의 연극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도발‘ 그 자체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17세기 고전극 이후 관객들에게 익숙하였던 미적 쾌감과 즐거움, 카타르시스는 커녕 생소함, 나아가 고통을 주는 연극을 본 관객들의 황당함은 모욕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객석에서는 야유가 터져 나왔고 평론가들은 ‘반연극’이라는 개념 자체에 반감을 나타내면서 무시와 혹평이 빗발쳤다.
7년 후인 1957년 2월 파리 위셰트 극장, 그간 지리멸렬해 있던 ‘대머리 여가수’ 공연에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연극 전문가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 유행을 좇는 딜레탕트, 속물 그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객 동원 성공은 뜻밖이었다. 몇 년 사이에 사람들의 예술 감각과 취향이 바뀐 것일까, ‘소통의 부재’라는 현대사회 화두가 그 때 벌써 설득력을 얻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68년이 지나는 사이 2만 여회 공연을 기록하며 오늘도 여전히 ‘대머리 여가수’는 위셰트 극장의 간판 연극, 파리의 대표 공연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작품은 무대 위에서의 행동이나 논리성, 심리적 관심 등을 배제하고 언어 질서와 상황 사이에 존재하는 어긋남, 뒤틀림, 차이를 치밀하게 형상화한다. 저녁나절 부르주아 두 커플이 펼치는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일상을 그려내지만 그 과정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끝내는 소음을 넘어 광란으로 치닫는 종잡을 수 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귀를 닫은 채 알 길 없는 자신의 이야기만을 늘어놓고 언어가 소통과 설득, 이해와 교감을 위한 채널이 아니라 마침내 의미를 간파하기 어려운 ‘소리’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 펼쳐진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의사소통의 어려움, 삶과 사회의 부조리를 오래전 예언, 희화화한 작가의 통찰력이 일,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7시, 위셰트 극장을 메운 관객의 열기와 호응으로 확인되고 있다. 극적 흥미나 오락적 요소를 찾을 수 없는 난해한 연극을 보러 좁은 지하극장을 찾은 관객들, 부조리 연극 발상지인 모국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에서일까. 관광객들로서는 파리에 가면 ‘꼭 봐야 한다는 (must see)’ 명소순례일까. 논리적 설명이 어려운 ‘대머리 여가수’ 흥행 기록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K-컬처 열기가 문화예술 장르를 넘어 일상 전 영역으로 확대되어 나날이 넓고 깊어지는 이즈음 ‘K-연극’ 분야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흡해 보인다. 영상 매체를 통하여 수월하게 국경을 넘어 전파되는 음악, 영화, 드라마 콘텐츠와는 달리 현장성, 일회성 그리고 언어 등의 제약이 있지만 우리 연극의 글로벌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특단의 장려책이 필요하다.
먹을거리와 관광 명소, 쇼핑에 더하여 볼만한, 꼭 관람할만한 명품 공연이 사람을 불러 모으고 도시와 나라의 이미지, 품격을 올리는 데 유효한 매체가 되기 때문이다. ‘대머리 여가수’가 70년 가까이 같은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프랑스의 현실을 그들의 특이한 ‘문화현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우리도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멋진 공연의 묘목을 심을 때인 듯싶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