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2] 273. 튀르키예 트로이 유적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가 10년에 걸쳐 벌인 트로이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트로이 전쟁은 BC 13세기에 벌어졌던 전쟁을 500여 년이나 지난 BC 8세기에 호메로스가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에서 소개했는데, 그에 의하면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 메넬라오스 왕의 왕비 헬레네(Helene)를 데리고 달아나자,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 왕은 형이자 그리스 최강국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에게 호소하여 벌어졌다. 그렇지만, 트로이 전쟁은 어떤 역사 기록도 없어서 호메로스의 창작인지, 역사적 사실인지 알 수 없이 오랫동안 아나톨리아 북서쪽에 있는 히살릭(Hisarlik)이 트로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호메로스의 기록을 사실로 믿고 자란 독일 출신 슐리만은 1870년부터 20년에 걸쳐 이곳을 발굴하여 유물을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트로이가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알게 됐다. 트로이 발굴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1996년 튀르키예 역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트로이는 차나칼레주 주도(州都)인 차나칼레(Çanakkale)에서 남서쪽으로 약 30㎞가량 떨어져서 이스탄불에서 페리를 타고 마르마라해를 거쳐 다르다넬스 해협의 차나칼레로 가거나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남쪽으로 약 200㎞ 떨어진 유럽 지역의 끝자락인 갈리폴리 반도의 겔리볼루(Gelibolu)에서 ‘차나칼레 1915 대교’를 건너가는 방법이 있다. 예전에는 이스탄불에서 마르마라해를 빙 돌아서 차나칼레까지 약 500여km를 달렸으나 2022년 2월 ‘차나칼레 1915 대교’ 개통으로 약 50㎞로 단축됐다. 튀르키예 건국 100주년인 2023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차나칼레 1915 대교의 ‘1915’란 튀르키예가 1차대전 당시 갈리폴리에서 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친 해를 의미한다. 한국의 DL이앤씨와 SK가 2017년에 착공하여 5년 만인 2022년 2월에 준공한 왕복 4차선, 총길이 3600m로 세계에서 가장 긴 최장 현수교(懸垂橋)다.
겔리볼루와 차나칼레는 다르다넬스 해협 사이에 있는 두 도시이지만, 모두 차나칼레주에 속한다. 겔리볼루는 주민이 약 3만 명인 소도시이고, 차나칼레는 50만 명이 사는 대도시다. 차나칼레란 예로부터 도자기가 유명하여 항아리(Çanak)와 성(Kale)이 합쳐진 지명이라고 한다. 참고로 겔리볼루의 옛 지명은 갈리폴리(Gallipoli)인데, 이곳은 1차 대전 때인 1915년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약 9개월 동안 연합군이 이스탄불을 공격하려고 그 길목인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벌이다가 오스만군에게 패한 격전지다. 피아간의 희생자만 50만 명이 넘었지만, 연합군이 대패하여 호주와 뉴질랜드는 4월 25일을 앤잭 데이(ANZAC Day)라 하여 현충일로 지정하고 있을 정도이고, 영국은 이 전투의 패배로 해군장관 처칠이 실각했다. 연합군은 이 전투를 ’1차 대전 최악의 상륙작전‘이라고 말하지만,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1차 대전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로서 전투를 지휘한 케말 파샤 대령은 공적을 인정받아 장군이 되었고, 또 독립전쟁 후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차나칼레 광장에는 영화 ‘트로이’를 촬영한 제작사가 남겨준 거대한 트로이 목마와 트로이 유적지 미니어처가 있다. 우리 가족은 튀르키예 제3의 도시이자 파묵칼레와 가까운 데니즐리에서 버스를 4시간 타고 차나칼레에 도착했지만, 이스탄불에서 트로이까지 당일치기 여행상품도 있다. 트로이 유적지 입장료는 100터키리라이고 (한화 약 3300원), 트로이 유적에서 가까운 트로이 박물관 입장료는 600터키리라이고, 음성 안내기는 60리라인데, 두 곳을 관람할 수 있는 통합입장권은 600터키리라다. 튀르키예 뮤지엄 패스도 좋다.
유적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광장에 커다란 트로이 목마가 있는데, 이 목마는 1970년대 그리스의 유명한 목수이자 권투선수였던 에페이오스가 관광용으로 만든 것이다. 목마의 뒷다리 사이에 있는 계단으로 목마 내부에 올라갈 수 있고, 목마 내부는 사람들이 양쪽으로 앉을 만한 공간이 있어서 목마의 뚫린 창으로 얼굴을 내밀며 기념 촬영하는 사람도 많다. 트로이목마 근처에는 미니 트로이목마 열쇠고리며, 그리스 병사 인형 등 기념품 판매점도 있고, 관광객에게 트로이 당시의 옷과 무기를 빌려주고 기념사진을 찍도록 권유하는 상인도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아를 읽었거나 영화 ‘트로이’를 본 사람이라면 트로이 유적을 기대하기 마련이지만, 트로이에는 볼만한 유물이 거의 없다. 그래서 학생들의 역사 탐험이 아니라면 여행사 패키지 프로그램에서는 아예 빼고 있는데, 현대 과학기술로 복원된 트로이는 성채를 중심으로 성벽 안의 도시는 약 30만㎡이고, 거주민은 약 5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소규모의 도시와 그리스 연합군이 10년이나 싸우면서도 쉽게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피차 세력이 그렇고 그랬을 것 같다. 트로이 유적 발굴 결과 이곳에는 청동기시대인 BC 4,000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데, 유물이 출토된 지층은 유적지 안내판에 숫자 1~9로 표시했다. 가령, 맨 아래 1 지층은 BC 4000년 말기의 것이고, BC 13세기 트로이전쟁 무렵의 유적은 7층, 그 위 8은 로마 시대의 유물, 맨 위의 9층은 헬레니즘 시대 및 로마 시대의 유적이다.
트로이 유적지에는 3개의 성문(城門)이 있는데, 동문에서 화살표 방향을 따라서 유적지를 한 바퀴 돌아본 뒤에 입구로 돌아오게 됐다. 동문은 폭이 2m쯤 되는 비좁은 성벽 사이를 진입하는 구조인데, 이것은 적군이 성안으로 쉽게 쳐들어올 수 없고, 설령 성안으로 쳐들어온다 해도 성문 양쪽의 공격용 탑에서 적을 협공하여 물리칠 수 있게 했다. 성문터를 지나 넓은 유적지는 건물터로 보이지만, 자세한 용도는 알 수 없다. 산으로 올라가는 유적 발굴지는 인공 테크를 설치해서 관람객이 크게 불편하지 않은데, 서쪽 성문은 아테네 연합군이 트로이 목마를 만들어서 아테나 여신에게 바친다고 거짓으로 써 붙인 뒤 목마를 놔두고 사라졌다는 곳이다. 동북쪽 요새(northeast bastion)에 오르면 멀리 ‘다르다넬스 해협’이 보이는데, 바다에서 이곳까지는 넓은 벌판이어서 벌판 어디쯤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북동쪽에는 헬레니즘~ 로마 시대인 ’트로이 8~9기‘ 유적에 전쟁의 신 ’아테나 신전 터‘가 있다. 아테나 신전 터에서 내려오면 ’트로이 2~ 3기‘ 시대인 BC 2600~ 2250년경에 흙으로 쌓은 ’성벽’을 복원하여 천막을 세웠는데, 청동기시대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백색 흙벽돌과 최근에 복원된 붉은색 벽돌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흙으로 쌓았음에도 성벽이 견고한 것은 흙에 낙타 젖과 달걀의 흰자를 섞은 반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쪽에는 로마 시대의 원형경기장 오데이온(Odeion), 의사당 불레우테리온(Bouleuterion), 공중목욕탕 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원형경기장은 규모로 보아 당시의 트로이는 매우 작은 도시였던 것 같다. 맨 마지막의 ‘남문 터’가 당시 트로이의 정문인데, 폭 3.3m쯤 되는 오르막길과 성문 양쪽에도 방어용 탑이 있다. 남문에서 트로이 성까지 마차가 드나들었을 완만한 오르막길은 1992년에야 발견됐는데, 남문 앞에서 헥토르와 아킬레우스가 일전을 벌인 끝에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고, 영화 트로이에서처럼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헥토르의 아내는 아킬레스가 헥토르의 사체를 전차에 매달아 끌고 가는 것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