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2] 277. 지중해 세계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지중해(Mediterranean Sea)는 오랫동안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삼 대륙 사이에서 문물을 교류하고 서로 싸우면서 역사를 이룬 ‘지구의 한가운데’였다. 지중해는 동쪽에서 대서양과 만나는 서쪽 지브롤터 해협까지 4100㎞나 되는 거대한 바다인데, 가장 큰 섬인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동·서지중해로 나눈다. 동지중해는, 이탈리아반도와 발칸반도 사이의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로 나누는데, 십자군 전쟁 이후 베네치아는 ‘베네치아의 동쪽 지역’인 동지중해만 오가면서 무역했다. 이 지역을 레반트(Levant)라고 하고, 레반트란 ‘떠오른다’라는 이탈리아어 ‘levante’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초기에는 지금의 튀르키예인 아나톨리아의 동남쪽인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 남쪽으로 멀리 이집트에 이르는 지역으로서 십자군 전쟁으로 세력이 크게 확대된 이슬람권 해역이다. 레반트 지역의 특징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육교 역할로서 레반트 해에서 가장 큰 섬은 키프로스 섬이다.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레반트해와 홍해가 연결됐고, 1차 대전 후 프랑스 위임 통치령이던 시리아와 레바논은 1946년 독립한 후에도 '레반트 국가(Levant States)’라고 한다.
크레타섬이 지중해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BC 2000년경에 최초로 '에게 문명'을 이루고, 크레타의 뒤를 이어서 이탈리아반도 남해안의 미케네(Mycenae)가 지중해 무역을 주도하다가 BC 1400년경에 사라졌다. 그 이후를 그리스 역사가 호메로스는 암흑시대(Dark Age)라고 했는데, 암흑시대에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과 소아시아의 트로이(Troy)가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을 벌였다. 트로이 전쟁은 500년이 지난 BC 8세기의 기록인데, 사실 트로이 전쟁은 발칸반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강성해지면서 소아시아의 맹주인 트로이와 에게해의 주도권을 둘러싼 소규모 전쟁에 불과했다. 트로이의 유적 규모를 보아도 그렇고, 10년 동안 공격했어도 트로이를 함락시키지 못한 그리스군 세력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는 이후 동방의 대제국 페르시아와 세 차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 이후 에게해의 주도권을 쥐었지만, 그나마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주도권을 다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벌이다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패망했다.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반도를 통일하고, BC 337년 그의 20세 된 아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는 아시아의 강대국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치고 페르시아의 수도 바빌론에 입성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지중해 건너 이집트를 정복하는 등 불과 12년 사이에 마케도니아~ 인도의 인더스강,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진정한 지중해 시대를 만들었다. 그는 대제국의 수도를 페르시아의 바빌론으로 정했지만, BC 323년 6월 바빌론에서 32세 때 열병에 걸려 죽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세계는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라는 신념 아래 그리스어를 세계 공용어로 삼고, 여러 민족이 혼인하여 세계시민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귀족 80여 명에게 페르시아 귀족 출신 여자와 혼인하게 하고, 자신도 다리우스 3세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특히 이집트의 지중해 어촌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건설하는 등 정복지마다 알렉산드리아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문화가 혼합된 새 문명 전파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의 사후에 대제국은 이집트와 남부 시리아를 차지한 장군 프톨레마이오스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에게해 연안에서 아시아 지역을 차지한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일부를 차지한 안티고노스 왕조 등 3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어 BC 30년 로마가 세계 제국을 이룰 때까지 약 300년간 그리스문화가 널리 전파되던 시기를 '헬레니즘(Hellenism) 시대'라고 한다. 헬레니즘이란 그리스인들이 데우칼리온과 피라가 낳은 아들 헬렌(Hellen)의 후손이라며 스스로를 ‘헬라스(Hellas)’라고 한 것에 독일 역사가 드로이젠(Johannn Gustav Droysen:1808~1884)가 ‘그리스인의 문화’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가 지중해로 눈을 돌리고, 반도에서 불과 3.2㎞ 떨어진 시칠리아섬을 놓고 카르타고와 다투게 되었다.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는 남한 면적의 4분의 1 정도인 2만 5000㎡나 되는 섬을 BC 8세기경부터 지금의 레바논 지역인 페니키아와 그리스가 시칠리아섬을 분할 지배하고 있었는데, 로마는 BC 264년부터 약 100년 동안 카르타고와 벌인 포에니 전쟁(punic war)에서 승리하여 시칠리아를 차지했다. 로마는 시칠리아 이외에 지중해의 섬을 대부분 식민지로 삼고, 그라시아(Gracia)라고 불렀던 것이 그리스(Greece)라는 국명의 유래가 됐다. 페니키아가 아프리카 북쪽 해안(Tunisia)에 세운 식민도시 카르타고를 통해서 시칠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시칠리아는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 게르만, 동로마, 아랍, 노르만, 스페인 등 다양한 외세의 영향을 받아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가득한데, 오늘날 시칠리아의 주도(州都)는 팔레르모이다. 섬 동쪽에는 그리스신화에서 뜨거운 용암이 터져 나오고 화산재가 흘러나오는 에트나(Etna:3370m) 화산을 지옥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했고, 섬 남쪽에는 몰타섬이 있다. 북아프리카의 튀니지(Tunisia)는 ‘로마의 빵 바구니’라고 하는 식량기지가 됐다.
지중해는 크레타 문명→헬레니즘 문화→로마문화, 그리고 8세기부터 이슬람문화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어 이집트, 모로코, 스페인 포르투갈 등 연안국가는 기독교문화와 이슬람문화가 뒤섞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 영역이다. 그동안 세 차례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화산재에 파묻힌 비운의 도시 폼페이, ‘돌아오라. 소렌토’의 가곡의 고향 소렌토에서 카프리섬과 시칠리아를 거쳐 아름다운 나폴리까지 페리를 타고 지중해 북쪽 이오니아해를 돌아보았다. 또, 동서문화가 마주치는 튀르키예에서 그리스로 갈 때도 크루즈를 타고 에게해를 건넜지만, 이것 모두 극히 좁은 동지중해 지역이었다. 그동안 목포에서 제주, 포항에서 울릉도, 그리고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가면서 탔던 페리는 엔진 소음과 기름 냄새에다 파도에 출렁여서 뱃멀미를 심하게 겪다가 방음시설이 완벽한 거대한 크루즈는 배의 엔진 소리는 물론 호텔 객실처럼 복도며 옆방 승객의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백화점을 올라가다가 쇼핑하고 싶은 층에서 내리듯이 지정된 객실 층에서 내리면, 긴 복도 양쪽으로 객실이 있다. 객실은 출입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침대가 2개씩 있고, 화장실에는 샤워실도 있다. 키오스섬을 비롯한 에게해의 섬 전부를 가졌던 오스만제국이 1차 대전에서 패한 뒤, 동지중해 섬 전부를 그리스에 빼앗겨서 튀르키예에서 불과 7㎞ 떨어진 히오스 섬(키오스섬)이 국경지대가 됐는데, 레반트에서 지브롤터 해협까지 지중해 연안의 도시를 돌아보는 지중해 크루즈 여행을 하는 것이 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