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칼럼-길을 걷다] 세대 간 간극, 우선 ‘경청’부터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 낙서형태로, 로제타석(石)에 그리고 파피루스에도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고 적혀있다는 이야기가 회자된다. 로제타석에는 이집트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 대한 칭송의 글이 기록되어 있어서 거론되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을 개연성이 적고 피라미드, 파피루스 경우도 보다 정밀한 검증이 필요해 보인다. 나이든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갈등에서 빠지지 않는 표현 중의 하나인 ‘버릇없다’ 등등의 문구는 동서양,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등장하는 상투어인데 21세기 전반기 우리 사회에서는 세대 간 갈등과 이질감이 한층 격화, 외연 된 듯싶다.
기본적인 출발점은 나이 차이로 인한 생각과 판단, 감성과 가치관의 간극이 유발하는 갖가지 이질감, 갈등이겠지만 이즈음 우리 사회가 당면한 세대 간 간극은 보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원인에서 촉발된다. 주거, 부동산을 비롯한 고용과 복지, 그리고 연금과 관련된 경제적 요인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정치, 사회적 충돌과 편차는 젠더 문제와 연결되어 한층 복잡다단한 양상으로 발현되고 있다. 여기에 가치관, 추구하는 행복을 향한 다른 시각 그리고 소통 방식과 라이프 스타일 같은 실생활 차원에 이르기까지 대립각은 첨예하다. 세대 간 불만과 불신이라는 큰 범주 속에서 비슷한 연령대에서도 처한 상황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산술적인 연령 차이로 인한 충돌과 갈등으로만 해석하기 어려운 복합성이 오늘 우리 사회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대학에 재직하며 비교적 지근에서 젊은이들과 생활하며 그들의 일상과 의식을 오랜 세월 지켜보았던 경험으로도 이즈음 젊은 세대들의 사고와 의식, 가치관은 복합적으로 보인다. 처음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할 때 최연장 수강생과 몇 년 전 마지막 강의 수강생들의 연령 편차는 대략 45년이었다. 물리적 나이차를 떠나 그 45년 사이의 의식과 감성, 가치관, 사회와 인간 그리고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편차는 족히 450년 정도 되는 듯싶었다. 가급적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생각하고 추론하려고 나름 애썼지만 수월치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디지털 환경에 노출되어 성장하고 외동이거나 형제자매가 하나뿐인 가정, 변화된 교육환경에서 성장하여 대학생이 된 세대들이 이제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40년간 대학에서, 가깝게 그들을 바라보고 일정 부분 일상에 동참하는 동안 다양한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보다 젊은 세대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으려니 했는데 절반은 옳고 절반은 그른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성세대가 취할 차선의 방안은 가급적 주관적 주장이 강하게 실린 발언, 참견과 개입을 자제하고 끈기 있고 자상하게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세와 노력이 아닐까 싶다. 섣부른 조언, 구태의연한 충고, 메아리 없는 훈계 그리고 1년이 종전 10년에 버금갈 상전벽해 세상에서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기성세대의 경험담, 무용담이 무슨 설득력이 있을까. 그나저나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여건 마련부터 쉽지 않은 현실이다. ‘경청(傾聽)’이라는 겸손하고 소박한 마음가짐이 새삼스럽다.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 - 정현종, ‘경청(傾聽)’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