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칼럼-길을 걷다] 자동차 번호판으로 문화를 읽는다
우리 사회 디자인 수준은 세계정상급이다. 제품 디자인, 시각 디자인을 비롯하여 곳곳에 스며있는 기발하고 감각적인 디자인 환경은 우리의 선진감성과 문화수준을 보여준다. 감성사회에 깊숙이 진입한 이즈음 제품과 서비스 선택기준이 가격이나 내구성보다는 ‘필(feel)’과 감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날이 강해지면서 감성이 이끄는 마케팅의 힘은 커져간다. 더 참신하고 보다 신선한 디자인의 영향력이 삶의 수준과 사회구성원의 문화감수성을 획기적으로 높여갔으면 한다.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된 디자인 수준에 비추어 다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의 하나가 자동차 번호판이 아닐까 싶다. 차량 디자인과 성능은 날로 세련, 첨단화되어 가는데 유독 번호판의 모양새는 오래전 바뀐 구성과 색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과거 각 지역명을 넣은 번호판을 전국단위로 통일한 이후 지금의 000-0-0000으로 조합하여 쓰고 있는데 아직 확장성이 높고 새로 바뀔 경우 소요되는 막대한 지출 등으로 당분간 그대로 통용되지 않을까 싶다.
중국. 일본 그리고 미국 등에서는 차량등록지 지역명이 번호판에 표시된다. 일본의 경우 지역명, 분류번호, 용도를 나타내는 히라가나 문자 그리고 고유번호 순으로 이루어지는데 번호판 색상으로 각기 차량 용도와 기능을 구분한다. 올림픽 등을 기념하거나 지역관광 번호판도 있다는데 다양한 색깔과 디자인으로 거리 분위기를 돋운다. 중국도 맨 앞에 지역을 나타내는 한자어를 배치한다. 수도 베이징은 경(京), 산동성은 이 지역 출신 공자를 기려 그가 살았던 나라 노(魯)자를 사용한다. 이어지는 숫자에서는 재물, 번영 등을 의미하는 발음과 유사한 ‘8’자가 많이 들어간 번호판이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는데 ‘오래’ (久)와 발음이 비슷한 ‘9’자 역시 선호된다.
미국 번호판의 특기할 점은 주(州) 단위로 각기 주를 상징하는 짧은 단어를 넣는다. 지역 자부심, 홍보, 역사, 미래 지향 등을 담아 독특한 어휘로 번호판을 장식하고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뉴욕)를 위시하여 애리조나 주는 ‘그랜드 캐년 스테이트’, 캘리포니아는 ‘골든 스테이트’, 미국 최초로 성립된 주라는 델라웨어는 ‘퍼스트 스테이트’라는 표현으로 작은 면적과 주민수를 만회하는 듯싶다. ‘선샤인 스테이트’ (플로리다), ‘알로하 스테이트’(하와이),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사건을 상기시키는 ‘더 스피릿 오브 아메리카’(매사추세츠 주), 그리고 뜬금없이 ‘쇼-미 (내게 보여줘) 스테이트’를 내건 미주리 주 등 각 주 자동차 번호판에 새긴 짧은 단어는 미국사회의 다양성, 그들이 나름 지향하는 비전을 암시한다.
캐나다도 알파벳과 숫자를 조합하여 번호판을 구성하는데 미국처럼 번호아래 각 주 나름의 문구를 덧붙인다. 퀘벡 주의 경우 ‘쥬 므 수비앵’ (나는 기억한다)이라는 프랑스어 문장이 생소하지만 눈길을 끈다<사진>. 대부분 각 주를 자랑하고 홍보하는 단어로 충당되는데 반하여 나는 기억한다 라는 문구는 400여년 퀘벡 역사의 영욕과 퀘벡인들의 의식, 내면세계를 요약하는 듯하다. 영어권 사회에서 프랑스어와 문화,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퀘벡인들이 겪어온 고난과 부침의 역사가 이 짧은 문장에 녹아들어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이 문구를 원한이나 앙갚음, 배타적 차원의 부정적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성 싶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교훈처럼 거쳐온 과거를 기억하며 새로운 미래를 도모한다는 진취적인 맥락으로 이해해본다.
우리도 다음 번 자동차 번호판 개편 기회에는 보다 다양한 디자인과 아이디어로 문화선진국, K-컬처의 아이콘을 하나 더 보탰으면 한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