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2] 283. 카이로 여행 ① 올드 카이로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나일강 동쪽의 카이로 주(州)는 인구 1,000만 명의 도시이지만, 푸스타트(Fustat)·올드 카이로(Old Cairo)·나일강 서쪽 지역인 기자(Giza)까지 포함하면 무려 2000만 명이 살고 있는 북아프리카 최대의 도시다. 카이로 구 시가지의 중심인 압딘 궁전(Abdin Palace)에서 남쪽으로 약 5㎞ 정도 떨어진 올드 카이로는 오늘날 카이로의 모체다.
신바빌로니아(BC 626~539)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고, BC 568년 이집트 정복에 나서 하(下) 이집트와 중(中) 이집트 중간 지역에 선박의 통행세를 받는 세관을 설치하고 바빌론이라고 했다. 그 후 로마가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도시의 남쪽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만들고, 디오클레티아누스 대제가 운하를 감시하는 요새를 나일강 동안(東岸)에 세웠는데, 642년 아랍의 파티마 왕조의 아무르 이븐 알 아스 장군이 로마가 세운 요새를 공격한 뒤 주둔지 푸스타트 북쪽에 현재의 카이로를 건설했다. 이때 나일강을 건너는 다리 끝에 바빌론 요새(Babylon Fortress)를 쌓는다고 멤피스의 왕궁을 비롯한 성채의 석재를 뜯어가면서 멤피스는 폐허가 됐다. 그나마 500년 뒤인 1168년 십자군이 이집트 공격에 나섰을 때, 파티마 왕조는 방어가 불가능하자 올드 카이로에 불을 질러서 54일간이나 불타 버린 뒤 폐허가 됐다. 올드 카이로는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의 피난처가 됐고, 이들이 믿었던 로마 가톨릭 이전의 기독교인 콥트교(Coptic Christianity)라고 한다.
올드 카이로는 도시가 확장되면서 카이로에 통합됐는데, 카이로 신시가지인 타흐리르 광장에서 지하철을 타고 20분쯤 가다가 지상 역인 마르 기르기스 역(St. Mar Girgis)에 내리면 올드 카이로다. 택시를 타도 약 15~20분쯤 걸린다. 마르 키르기스 역에서 마주하는 올드 카이로 지역을 에워싼 성벽이 ‘바빌론 요새’이고, 역에서 바라보이는 오래된 건물이 콥트 박물관이다.
콥트 박물관은 초기 기독교 성경부터 성화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유물이 많다. 예수의 열두제자가 로마의 속주로 포교를 나갈 때, 마르코(Marco)는 로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서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온 뒤 이집트의 토속어인 콥트어(Cope)로 ‘마가복음’을 써서 포교에 나섰다. ‘마가복음’은 훗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준이 됐고, 마태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과 함께 신약성서의 ‘4대 복음서’라고 한다.
이집트에서 콥트교의 업적은 세상이 점점 혼탁해지고 사제들의 타락이 심해지자, 대 안토니오(Antonio the Great: 251∼356)가 기도와 명상을 강조하는 수도원을 창설하여 그를 '수도자의 아버지'라고 한다. 또, 파코미오(St. Pachomio: 290∼346)는 각각 홀로 은둔하던 수도자들이 한 곳에서 공동생활을 하도록 해서 5세기 말에 이집트에는 수백 개의 수도원이 생겼고, 6세기에는 수도사 베네딕토에 의해서 이탈리아로 전파되어 수도원이 전 유럽에 확산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와 대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와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논쟁에서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가 아타나시우스의 성부·성자·성신의 삼위일체설(trinity)을 정통으로 인정하여 로마 교황청의 바탕이 되었고, 아리우스파는 이단이 됐다. 그 후 콥트교는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됐는데,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콥트 교황청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공중교회는 이집트 콥트교의 총본산이 됐다. 또, 이집트인들은 640년경부터 20세기 초까지 1,400여 년 동안 아랍의 지배 아래 아랍어를 사용하여 자국의 고유한 초기 언어를 모두 잊어버렸다가 근래에 민족의식이 고조되면서 종교를 초월하여 콥트어를 통한 '이집트인의 정체성’ 찾기에 나서고 있다.
오랫동안 이슬람국가인 이집트에서 콥트교도들은 올드 카이로의 쓰레기장인 '자발린'(Javalin)에 약 3민 5000명이 살고 있지만, 교육 수준도 높고 경제력도 상당하다. 1992년부터 4년간 UN 사무총장을 역임한 부트로스 갈리(Boutros-Ghali), 이집트 최대 기업인 오라스콤(Orascom) 그룹의 창업자 온시 사위리스(Onsi Sawires) 등도 콥트교 신자이다. 하지만, 이슬람 광신도들과 무장단체가 공격하고 피해를 주어도 경찰은 소극적이고, 처벌도 미온적이어서 갈등이 심하다.
마르 기르기스 역에서 가장 가까운 바빌론 성채의 두 요새를 연결하는 통로에 세워진 알 무알라카 교회(al-Moallaka Church)를 ‘공중교회’(Hanging Church)라고 하는데, 무알라카란 ‘매달린’이라는 뜻이다.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공중교회의 정식 명칭은 ‘성모 마리아 콥트 정교회’인데, 교회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면에는 8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110여 점의 모자이크와 성상화(icon)들이 가득 새겨 있어서 원시기독교 교회임을 말해준다. 공중교회에서 반대편으로 가면 전철역에서 보였던 화려한 종탑의 거대한 성 조지 교회(St. George Church)인데, 성 조지 교회는 팔레스타인 출신 로마 군인 마르 기르기스(Mar Girgis)를 기린 성당이다. 올드 카이로의 지하철역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대제가 기독교도를 숨겨주지 말라는 법을 어겼다가 순교한 인물로서 14성인 중 한 사람으로 영국, 러시아, 조지아 등에서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성 조지 교회 입구 상단에는 마르 기르기스가 창으로 용(dragon)을 찌르는 부조가 있는데, 아랍에서는 용을 사악한 존재로 여겼다. 그리스정교회소속인 성 조지 교회는 이슬람 건축양식인 돔 형태인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푸른색의 장식 타일 천정으로 아름다워서 지역 주민들에게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높다.
성 조지 교회에서 헌책방 골목과 쓰레기 마을인 자발린을 지나면 길이 비좁고 복잡해서 택시조차 잘 들어가지 않는 산기슭에 ‘아기 예수 피난교회’가 있다. 아기 예수 피난교회는 이스라엘의 헤롯왕이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이라고 하는 것을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알려주자, 요셉은 성모 마리아와 갓 태어난 예수를 안고 이곳까지 피난하여 3개월간 머물렀다고 한다. 요셉의 가족이 떠나간 뒤, 그들이 머물렀던 지하 동굴 위에 교회를 짓고 ‘아기 예수 피난교회’라고 했는데, 교회 입구에는 요셉 가족의 피난 역정을 그림으로 표시한 안내판이 그려져 있다. 교회는 오랫동안 이슬람의 점령 치하에서 지하 동굴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보았다고 해서 ‘동굴교회’라고도 하는데,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서 모스크 사원 느낌이 많다. 교회 내부는 두 개의 복도와 중앙홀, 세 개의 본당이 있는데, 본당은 열두제자를 상징하는 코린트 양식의 대리석 기둥이 양쪽으로 5개씩 줄지어 있고, 중간에 2개 등 12개가 있다. 그중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세워진 붉은색 기둥 하나는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를 상징한다. 지하 동굴로 내려가면 작은 제단과 가족이 식수로 사용했던 샘과 아기 예수를 놓았던 요람 같은 공간도 있어서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 코스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