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姓)·입향성씨(入鄕性氏) 11) 여산 송씨(礪山宋氏) ⑪
고려말 조선초 연산면 화악리에 입향
여산송씨 가문이 번성한 시기는 4세손 송송례(宋松禮)대에 와서이다. 여산송씨는 조선시대 영의정 1명과 좌의정 1명, 왕비 1명(단종비 정순왕후 定順王后,1440년~1521년), 판서(정2품장관)급 인물을 많이 배출한 이름난 가문이며 우리나라 송씨(宋氏)의 제일 큰 집이다.
정가공파(正嘉公派)의 파조(派祖)인 송서(宋瑞, ?~1353,시호 정가)의 세 아들 중 둘째 송윤번(宋允蕃)이 현재의 대전시 유성구 진잠에 낙향하여 진잠에 묘소가 있고, 송윤번의 큰아들 송전[(宋琠, ?~1435(세종17년)]과 송전 자손들의 묘소가 연산면 화악리에 있다.
1300년대에 연산면 화악리로 이주해와 조선 전기 연산지역에 정착한 가문 가운데 여산송씨는 제일 먼저 입향한 성씨가 되었다. 송전(宋琠)은 1407년 충청도 도만호(都萬戶, 수군을 거느리던 종3품 무관)로 바다에서 구황(救荒, 흉년 등으로 기근이 심할때 빈민을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도움)할 물건을 채취했으며, 충청도 병선 11척을 이끌고 전라도의 왜구를 수색했다. 감찰규정(監察糾正, 감찰어사로 백관을 규찰하던 종6품 검사)을 지낸 김의진(金義珍)의 딸과 혼인하여 송명산, 송인산, 송덕산,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한성부를 다스리던 정2품 서울시장으로 6조판서 등과 함께 9경이라 함, 검교는 명예직)를 지낸 송복산(宋福山,1390~1469,호는 묵재) 등 네아들을 두었다. 송복산은 1469년 78세로 죽었으며 묘는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에 있다.
여산송씨가 연산면 화악리에 정착한 이후 외손(外孫) 가문이 입향하게 됐고 대표적인 여산송씨 외손(外孫)가문은 가평이씨와 고성이씨, 전주이씨, 성주도씨 등이다. 이러한 외손 가문의 입향으로 여산송씨가 처음 입향(入鄕)한 연산면 화악리는 가평이씨 등 이들 외손(外孫) 가문이 주류를 이루게 됐다.
현재 송전의 아들 송문림의 묘표가 남아 있는데, 묘표는 1500년대 세워진 것으로 비명은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앞면에는 ‘통정대부승정원좌부대언송공지묘(通政大夫承政院左副代言宋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화악리에는 후손들의 묘가 산재되어 있고 많은 묘비와 묘표가 남아 있으며, 여산송씨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연산 지역에 세거하며 토착세력으로서의 여산송씨는 당시 중앙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하던 가문들과 혼인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했기 때문에 여산송씨의 외손(外孫) 관계를 통해 또 다른 성씨의 논산 세거 과정도 파악할 수 있다. 여산송씨 묘역과 제단이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 산 20번지에 조성되어 있어 여산송씨 정가공파후손들의 마음의 고향은 여전히 연산에 있다.
화악리에는 여산송씨 정가공파 파조 송서의 제단(祭壇)을 비롯해 묘역 132㎡ 면적에 장남 송인번(宋仁蕃)의 묘와 송윤번의 제단이 있고 송윤번의 장남 송전의 묘와 송전의 삼남 송인산(宋仁山)의 묘, 송인산의 차남 송문림의 묘와 송문림의 자손들 묘가 조성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