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 없는 지식은 헛것' 출세지향 교육을 꾸짖다

명재 윤증 종가의 종학당 이야기

2010-05-13     이기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출셋길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출세의 기준이 워낙 다양해져 딱히 ‘이거다’라고 꼽히는 것은 많지만 일반적으로 서울대 입학, 사법고시 합격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사법고시 합격이 유일한 신분상승의 통로는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의 가장 막강한 파워엘리트 집단은 사법고시 출신들이고 이들의 학벌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조선시대엔 어땠을까? 지금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 않았다. 지금의 고시에 해당하는 과거시험이 그 당시엔 신분 상승의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가문의 영광을 일굴 수 있는 단 한방의 카드가 곧 과거급제였고 장원이면 금상첨화였다.

▲명가의 탄생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조선시대 과거(문과)급제자 수는 대략 1만 4000여 명이다. 요즘 서울대 합격자나 사법고시 합격자 수로 고등학교에 서열을 매기는 것처럼 과거엔 본관에 서열을 매겼다고 볼 수 있는 데 이중 가장 괄목할만한 가문이 바로 파평윤씨다. 과거급제자 본관별 서열이 전주이씨 840여 명, 파평윤씨 410여 명, 안동권씨 360여 명, 남양홍씨 320여 명, 안동김씨 310여 명 등으로 이어진다는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파평윤씨 과거급제자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대목은 노종파 줄기에서 모두 42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바로 명재 윤증의 자손들이다.

명재 윤증이 누구인가. ‘백의정승’, 즉 관복을 입고 벼슬에 오르지 않고도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열 일곱번이나 임금의 벼슬 제의를 거절한, 마지막엔 ‘영의정’ 자리도 마다하고 후학양성에 정열을 불태운 선비의 전형이었다. 권력을 향한 치열한 모사가 판치는 조정에 발을 담그지 않겠다는 일종의 고집(?) 이었다고 해야 할까?

▲과거급제의 요람 ‘종학원’

흔히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데 이 ‘충청도 양반’이 있게 한 주인공은 바로 호서지역 3대 명문가(연산김씨, 노성윤씨, 은진송씨)다. 사계 김장생, 명재 윤증, 우암 송시열 등 당대 기호학파의 거두들이 바로 충남 논산에서 학문을 넓혔고 이곳에서 인재양성의 요람이 만들어졌다. 논산엔 수많은 기호학파의 유산이 남아있는 데 이중 ‘종학당’과 ‘백록당’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윤증의 백부인 동토 윤순거(1596∼1668)는 벼슬에서 내려와 가문의 백년대계를 설계했는데 결론은 가문의 인재양성이었다. 지금의 논산시 광석·노성면 일대가 대부분 노성윤씨의 소유였는데 그 부(富)를 토대로 인재의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져야 ‘가문의 영광’을 이어갈 수 있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다.

이 같은 판단의 결과물이 바로 종학당과 백록당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가문의 자손을 위한 기숙형 사립학교라고 할 수 있고 운영상 측면에서 보면 사관학교로 이해하면 된다. 종학당에선 일단 초등과정을 교육하고 이중 과거시험을 볼 수 있을 만한 인재를 선발해 백록당에서 중등·대학과정을 교육했다. 처음엔 문중의 자녀만을 교육대상으로 하다 점차 범위를 넓혀 인근 지역의 중산층 자녀들까지 받아들여 조선시대 성균관과 쌍벽을 이루는 사학으로 거듭났다. 체계적인 학습계획을 갖추고 율곡의 독서순서대로 책을 읽게 했으며 생활규칙도 엄격해 ‘예의에 어긋나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는 몸가짐을 익히도록 했다. 예의를 근간으로 인성을 교육하는 데 더 심혈을 기울였는데 문중의 어른(스승)이 ‘멘토’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가정교육을 겸했다고 할 수 있다.

백록당은 길게 연결된 복도 뒤로 4간의 교실로 나뉘어 있다. 수준별 학습을 위해서다.백록당과 연결된 정수루에선 휴식과 함께 토론이 이어졌는데 여기선 과거시험과 무관하게 경제 분야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기도 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수업료를 받고 교육을 한 게 아니라 장학금을 줘가면서 문중의 자손을 교육했다는 것이다. 문중 교육을 위해 일할 아이를 빼왔으니 당연히 그 집에 값을 치르는 게 맞다는 판단에서다.

지금도 노성윤씨 종가는 일 년에 한 번 250명 정도 되는 후손들을 불러 모아 종학원에서 세미나를 연다. ‘가문의 영광’을 제대로 알고 그 뜻을 이어가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15년 전부터 다시 시작한 이 작업엔 윤덕병 한국야쿠르트 회장과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등이 힘을 보태고 있다.

이기준 기자 lkj@ggilb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