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姓)·입향성씨(入鄕性氏) 12) 공주이씨(公州李氏,공산이씨) ③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 ··· 독립운동가 이필주

2013-03-22     김진우

민족대표 독립운동가 이필주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이었던 이필주(李弼柱,1869년(고종 6)∼1942년)는 독립운동가로 경기도 고양 출신이다.(또는 서울 정동 출신이라 함)

부친은 한학을 한 선비로 알려져 있으나, 이필주가 태어날 당시 집안은 이미 퇴락하였으며 생활 또한 빈곤하였다. 이필주는 8세부터 한문 글방에 들어가 5년 동안 한문을 공부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생업 전선에 뛰어든 이필주는 제사(製絲)일을 배워 가사를 도와야 했다. 그러던 중 18세 되던 해 부친이 별세하고 자신도 흑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때부터 그는 가장으로서 헤어날 수 없는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 1890년 봄, 친구의 권유로 구한국 군대에 사병으로 입대하게 되었는데, 군입대는 그에게 그나마 활로가 됐다. 선천적인 무관성격으로 졸병이나마 매월 받는 월급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세에 한국군대에 입대, 단시일에 승진해 장교로 8년간 복무했다.

구한국 군대 사병으로 근무하던 중, 이필주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 진압에 동원돼 전라도 전주, 완산 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군생활을 청산하고 남대문에 있는 상동예배당의 전덕기(全德基)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가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훗날 회고에서 밝혔듯이, 그는 ‘골육이 서로 싸우는 난리’에서 괴로움을 떨치지 못하였다. 그 같은 괴로움은 끝내 군대를 박차고 나오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군대 시절 이필주는 군규(軍規)를 잘 지키고 기예운동에도 남달리 노력하여 시험 때마다 승급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말단 사병에서 하사관급의 참교(지금의 분대장)로 승진하였고, 얼마 안 있어 시위대가 설립될 때, 다시 부교(副校)로 승진하면서 하급지휘관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이필주는 1897년 29세 되던 해 김해 김씨 인숙(仁淑) 여사와 결혼하여, 이후 5년여 동안은 군대 생활에 만족하며 자식 남매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국가보훈처 자료>
이필주는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해 일주일간 단식하고 두문불출했다. 종로청년회관(YMCA) 초대 체육교사로 재직하다 상동공옥소학교(尙洞攻玉小學校)의 체육교사로 전임해 애국정신과 광복의 큰 뜻을 청소년에게 가르쳤다.

모범적인 기독교신자로서 미신타파와 계급차별의 배격 등 신생활운동도 전개했다. 그 뒤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에서 목자생활을 하며 조국독립에 대한 이상을 품고 이상재(李商在), 최병헌(崔炳憲) 등과 친분을 쌓았다.

3·1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이 구체화되던 1919년 2월 27일,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등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함태영(咸台永)이 최린(崔麟)으로부터 가져온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 초안을 회람하고, 기독교측 민족대표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했다.

같은 달 28일 밤 재동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전개에 따른 계획을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돼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종교활동과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말년에는 수원 남양교회를 맡아보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출처-지식백과>
공주이씨(公州李氏, 공산이씨)는 시조 이천일(李天一)의 36세손 양호공 이우(李偶)의 후손에서 크게 번창해 이우(李堣)의 아들 이저(李苧)가 고려에서 대제학(大提學:보문각의 종2품 문형)을 역임하고 화성부원군(花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이사손(李思孫)의 두 아들 이엽(李曄)과 이서(李曙)의 대(代)에서 7파로 분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