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姓)·입향성씨(入鄕性氏) 14) 진주강씨 ④

강백년, 청백리에 예학 조예 깊어

2013-07-05     김진우

강백년(姜栢年)은 예조판서(判書, 정2품 장관), 의정부의 우참찬(右參贊, 정2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중추부의 종1품)에 이르렀다. 관직 재직 중에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때 사직되었을 때와 만년에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한계(閑溪)마을에서 지냈었다고 전해진다. 강백년의 뛰어난 학행과 업적에 대한 내용뿐 아니라 충효에 관해 진천군지(郡誌)에 수록돼 전하고 있다.

강백년(姜栢年)은 은열공 강민첨의 후손이며, 효자로 정려를 받은 강운상의 손자이고, 죽창 강주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동김씨 김응서의 딸인데 그가 3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아버지 죽창공이 기르면서 글을 가르쳐 15세 때에 향시(鄕試)에 급제하였다. 25세 때에는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언(正言, 정6품 간언관),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4품 부장검사인 장령(掌令)을 지냈고, 1646년 소현세자빈(강빈)이 인조 독살기도의 혐의로 처형된, 이른 바 강빈옥사가 일어나자 부교리(副校理,교서관 등의 종6품)로서 강비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삭탈관직됐다.

그러나 다시 문과 중시(重試, 이미 급제한 사람이 중시에 합격하면 당상관에 오름)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에 올랐고, 다음해에 향교를 부흥시킬 것을 상소하여 전국적으로 향교가 크게 부흥되게 하였다. 그러나 1648년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大司諫, 정3품)으로 있을 때에 다시 강빈의 신원을 상소하였다가 청풍군수로 좌천되었다.

그는 주로 삼사(三司-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와 승정원에 봉직하면서 직언으로 정론을 폈고, 청풍군수, 강릉부사와 충청·황해·경기감사(監司, 종2품 관찰사) 등 외직도 두루 역임했는데, 특히 청풍군수 때에는 어사가 그의 청백함과 백성의 사랑함을 효종에게 아뢰니 왕이 옷 한 벌을 상으로 내리었고, 충청감사 때에는 호서에서 대동법을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을 잘 처리하여 호서인의 칭송을 받았다.

1660년(현종1)에는 예조참판(參判,종2품 차관)으로서 동지부사(冬至副使, 사절단의 두번째 서열)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강백년은 예학에도 조예가 깊어 예조판서를 두 번이나 했고, 예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후일 청나라가 자국 황후의 상사(喪事)를 입고 모두 슬퍼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따르려 하였으나, 강백년이 "이것은 예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다." 라고 반대하여 이를 철회케 하였다.

강백년은 조정에 출사한지 55년 동안 다양한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중앙직 만으로도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정3품), 대사헌, 지신사(知申事, 정3품 도승지), 성균관의 수장인 대사성(정3품), 예조판서(정2품 장관) 등을 들 수 있다.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고, 1690년(숙종16)에 영의정에 증직 되었으며, 그 뒤에 청백리로 선록되었다.

강백년은 기질이 청명하고 행실이 단정하였으며, 효우가 돈독한 인물이었다. 그의 문장은 일세의 복종하는 바가 되었으나, 겸손하여 이를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반드시 대학을 한번 외우고, 염락의 책들을 항상 몸에 지녀서 따로 이름짓기를 ‘한계만록’이라 하고, 심학의 중요한 말과 고금의 가언 선행 대학 8조목 등에 대한 견해를 펴서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을 경계하는 자료로 삼았는데, 항상 말하기를, “평생에 큰 허물이 없는 것은 모두 이 책의 공이다”라 했다.

세상 적인 향락을 일체 좋아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이 치닫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고고하게 스스로를 구별하여 혹시라도 자신을 더럽힐까 조심했으며, 평생토록 첩을 두지 않았다.

사는 곳이 비록 초가집 두어 칸에 풍우를 가릴 수도 없고, 맨밥과 거친 밥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치 궁핍한 선비와 같아서 벼슬과 명망이 높은 관원이었음을 알지 못한 듯 하였다. 추운 겨울에 차가운 구들을 견디기 어려움에도 눈을 부치며 편안한 듯 처해서 말하기를, “내 사는 것은 비록 괴로우나 요격하고 순찰하는 졸개에 비하면 편안하다”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