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姓)·입향성씨(入鄕性氏) 14) 진주 강씨 (20)
강민첨, 거란군을 격파한 고려 명장
강백년의 아들 강선(姜銑)과 강현(姜鋧,1650(효종 1)~1733(영조 9)-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정(子精), 호는 백각(白閣), 경암(敬庵))은 예조판서(禮曹判書: 정2품 장관)와 형조판서(刑曹判書: 정2품 법무장관)를 거쳐 대제학(大提學: 홍문관, 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이르러 유명했으며, 좌찬성(左贊成: 의정부의 종1품 재신)에 올랐다.
강현(姜鋧)의 아들 강세황은 6조의 참판(參判: 종2품 차관)을 역임하고 한성판윤(判尹: 정2품 서울시장)을 지냈으며 시, 서, 화(詩書畵)로 유명했다.
특히 강세황의 문하에서 불세출의 화가 김홍도가 나온다.
강노(姜人+老은열공 20세, 자는 기중(期仲), 호는 표운(豹雲), 정은(貞隱), 시호는 익헌)는 강세황의 증손자로, 철종 때 대사간(大司諫: 왕에게 간언을 하던 사간원의 정3품)과 병조판서(정2품 국방장관)를 거쳐 좌의정(左議政: 정1품 정승)에 이르렀다.
강노(姜人+老)는 현감(縣監,종6품 수령)을 지낸 강이구(姜彛九)의 아들이다.
1837년(헌종 3)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1848년 증광문과(增廣文科, 나라에 큰 경사있을때 보던 과거)에 병과로 급제, 1850년(철종 1) 승문원의 정자(正字, 정9품)가 된 뒤 홍문관의 응교(應敎, 홍문관(弘文館)에 딸리어 궁중(宮中)의 경서(經書), 사적을 관리(管理)하던 정4품 서기관 문신)를 거쳐 1857년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정3품)이 됐다.
원래 북인(北人)계열로서 노론(老論) 중심의 세도정치 아래 중용되지 못했으나, 흥선대원군이 집정한 후 남인계와 북인계를 많이 기용함에 따라 1866년에는 병인양요로 피폐해진 강화도에 위유사(慰諭使)로 나가게 됐다.
강민첨(姜民瞻:?~1021)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명장
강민첨장군의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그는 목종(穆宗)때 문과에 급제하고 1012년(현종 3)에 안찰사(按察使: 절도사)로서 영일(迎日) 등지에 쳐들어온 동여진(東女眞)을 격퇴했다. 1018년(현종 9)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 강감찬(姜邯贊)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해 흥화진(興化鎭)에서 이들을 격파했으며 거란군이 바로 개경(開京)으로 쳐들어가자 이를 추격하여 자산(慈山)에서 크게 이겼다.
그 공으로 응양위상장군, 주국, 우산기상시(鷹揚衛上將軍: 상장군은 정3품 중앙군 최고지휘관. 柱國: 주국은 두번째 훈호. 右散騎常侍: 우산기상시는 중서문하성의 정3품)가 되고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책록됐다.
이듬해 병부상서(兵部尙書: 정3품 국방장관)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2품)에 올랐고 사후에 태자태부(太子太傅:정1품)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 산 34번지에 있는데, 반구형의 봉분 아랫부분에 잘 다듬은 둘레석을 둘렀다.
묘갈명(墓碣銘)에는 “…병부상서(정3품국방장관), 문하시랑(정4품차관)을 지내고 개국남에 봉군된 시호는 은열 강민첨 묘”라 음각되어있다.
묘의 앞에는 상석,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좌우로 동물상, 동자상, 망주석, 인물상이 있다. 묘역 앞에 1957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비문(碑文)은 강민첨 장군의 24대손 강태현이 썼고 글씨는 25대손 강태석이 새겼다.
진주강씨(晉州姜氏)는 강희맹이 세종 때 장원급제하는 등 장원급제자 10명을 포함해 조선시대에 문과(文科: 대과. 문관을 뽑던 과거)에 223명, 무과(武科: 무관을 뽑아쓰던 과거로 시험은 병서와 무예)에 144명, 사마시(司馬試: 생원, 진사를 뽑던 시험)에 512명, 역과(譯科: 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쓰기 위해 뽑던 과거)에 16명, 의과에 8명, 음양과(陰陽科: 천문, 지리, 명과학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3명, 주학에 1명 등 90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해 문무를 겸비한 인물을 배출시킨 전통의 명벌(名閥: 문벌이 좋은 집안, 명가)로 명성을 떨쳤다.
경남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강민첨 장군의 탄생지는 ‘경남기념물 제14호’로 지정돼 있다. 인구조사에서 진주강씨는 1985년에는 22만 3578가구 94만 1094명, 2000년에는 30만 724가구 96만 671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