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15)순흥 안씨(順興安氏) 10

'숙수사' 절터에 세워진 백운동서원

2014-01-24     김진우

1543년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해다.

백운동서원은 중국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강서성 백록동에서 재건한 백록동서원을 모방한 것이다. 주세붕이 서원을 세운 것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을 모신 후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서였다. 백운동서원은 원래 숙수사라는 절 터다. 지금도 서원 앞에는 숙수사의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남아 있다.

주세붕의 주장에 따라 백운동서원을 짓자, 밤마다 서원 옆 바위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이 소문은 동네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주세붕은 참으로 난감해서 주민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울부짖는 소리가 세종의 비 소헌황후 심씨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관노의 고자질로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함께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라 말했다.

현재 소수서원 근처에 금성대군을 기리는 금성단이 남아 있다.

안향(安珦)의 아들로 1282년(충렬왕 8년)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한 안우기(安于器)는 우부승지(右副承旨, 정3품 승지)와 밀직부사(密直副事, 정령을 출납하던 밀직사의 3품)를 역임하고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지밀직(知密直)으로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 1만 800권을 검열했다.

대사헌(大司憲, 종2품 검찰총장)을 거쳐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정2품 부총리 명예직)와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재상급이 맡던 벼슬로 고려 후기 제사를 주관), 시호(諡號)의 제정을 맡아보던 관청인 전의시(典儀寺) 등을 지낸 후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고려가 망하자 형조 전서(刑曹典書, 정3품 법무장관)로서 벼슬에서 물러났던 안원(安瑗)은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돼 유배되기도 했으나, 태조(太祖)가 개성(開城)의 유수(留守, 2품 지방장관)로 있게 하고 그의 충절을 극찬해 후에 시호(諡號)를 경질(景質)로 하사(下賜)했다.

호상한 성품으로 구김이 없었던 그는 항상 책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산골짜기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서 이첨(李詹)이 찾아가 보니 안원이 나무에 기대 왼 팔에 매를 얹어 놓고 오른손으로 주자(朱子)가 지은 통감강목(通鑑鋼目)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안원(安瑗)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文臣)으로 초명은 정(定)이다.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행정을 총괄하던 종2품 재신)을 지낸 안원숭(安元崇)이다. 1374년(공민왕 23년)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마다보던 정기과거)에 병과로 급제해 여러 벼슬을 거쳐 공조전서(典書, 정3품 장관)를 지냈다.

1390년(공양왕 2) 국왕이 천도하려고 하자 이는 술사(術士)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건국 후에는 정치 참여를 거부하니, 이로써 반대파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했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강제로 구도(舊都)의 관리를 맡기고 유후(留後, 2품 지방장관)라 하였는데,유후(留後)의 관직명은 이때부터 사용됐다.

그 뒤 태조가 형조전서(典書, 정3품 법무장관)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해 몸소 찾아가 간청, 벼슬에 나아가니, 1401년(태종 1)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사(謝恩使, 중국이 호의베풀때 감사함을 전하러 가던 사신))가 돼 명나라에 건너가서 대학연의(大學衍義).통감집람(通鑑集覽) 등의 서책을 구해왔다.

1404년 경상도도관찰사(都觀察使, 종2품 감사)를 지내고 1407년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인 대사헌(大司憲)이 돼 태종의 밀명을 받고 외척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 형제를 탄핵해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이어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서울시장)와 개성유후(開城留後)를 역임하고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