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15)순흥안씨(順興安氏) 21
안윤희가 장가들어 예안김씨와 사돈지간
합강리에는 순흥안씨, 예안김씨, 인천채씨가 살고 있는데, 순흥안씨는 가람뜸에 많이 살고, 예안김씨는 양지말, 인천채씨는 잿절에 많이 살고 있다.
순흥안씨와 예안김씨는 혼인으로 맺어진 사돈관계이다.
순흥안씨의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추밀공파(樞密公派), 둘째가 별장공파(別將公派), 셋째가 교서공파(校書公派)로 분파(分派)됐다.
추밀공파(樞密公派)의 7세손인 안조동(安祖東)을 파조(派祖)로 하는데, 이를 양공공파(良恭公派)라 부른다. 안조동(安祖東)은 고려 말 인물로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으로 낙향했다. 이곳에는 양공공(良恭公)을 비롯해 14대까지 묘소와 재실이 있다.
양공공(良恭公) 안조동(安祖東)이 죽었을 때 후손들이 문중의 고향인 순흥에 묘(墓)를 쓰기 위해 상여를 메고 가던 중 현재 부강고등학교 근처에 다다르자 갑자기 상여가 부서졌다. 후손들이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자리가 좋아 명당이라 판단하고, 고향인 순흥으로 가는 것을 중단하고 현재 위치에 묘(墓)를 썼다.
그 후 양공공(良恭公)의 6세손인 안윤희(安允禧)가 현도면에서 분가(分家)해 합강리로 들어오게 됐는데, 안윤희(安允禧)의 부인은 예안김씨(禮安金氏)이다.
당시 이곳에는 예안김씨(禮安金氏)들의 세거지역이었다. 그 당시에는 결혼풍습이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를 들러 가기 때문에 처가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다. 예안김씨(禮安金氏)는 이곳과 인근의 공주시 우성면, 청양군, 청남면 등지에 많이 세거했다.
안윤희(安允禧)도 예안김씨(禮安金氏)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예안김씨(禮安金氏)들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안윤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안곤과 안붕(安鵬)이다. 이들은 각각 1파(派), 2파(派)라 부르는데, 재실이 합호서원 옆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12일과 13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
한편, 예안김씨(禮安金氏) 시조는 고려 숙종 원년때 경상북도 안동군의 예안에 정착한 김담(金淡)으로 그의 후손 김만인(金萬引)이 충청도로 이주하고, 그의 아들 김몽가(金蒙哥)가 공주의 장기면 오공동에 살다가 그의 아들 김삼섭(金三燮)이 합강으로 처음 이주해 살았다. 김상섭은 승정원의 정3품당상관인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는데,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이니 순흥안씨는 그 후에 이곳으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합호서원은 순흥안씨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고려시대 주자학을 들여 온 안향(安珦, 1243~1306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716년(숙종 42년)에 건립한 합호사(合湖祠)를 그 시초로 하고 있다.
그 후 1843년(헌종 9년)에 후손 안정량(安靖良)과 안사량(安師良)이 연기의 유림들과 청원해 합호서원으로 승격시키면서 신덕제(辛德濟)와 박금서제(朴琴書濟)를 함께 배향했다.
1896년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으로 합호서원도 훼철(없어짐) 됐다가, 1931년 후손 안배호 등이 유림의 동의를 거쳐 서원을 복원하기로 하고, 1937년 본전과 내삼문을 재건했다. 1949년 지역 유림이 협의해 성균관에 상신 서원 복설 허가를 받아 1950년 합호서원으로 정식 현액(현판을 걸음) 됐다. 1990년도에 후손 안순근이 면장(面長)으로 있을 때 군비(郡費)와 도비(道費)를 받아 전사청과 외삼문을 재건했다.
안향과 함께 배향됐던 신덕제는 안향의 제자이고, 박금서제는 그 후대 사람으로서 서원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위패를 배향하지 않고 안향선생만 모시고 있다.
합호서원은 입구에 외삼문을 세웠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내삼문이 있다. 외삼문의 동편에 성의재가 있고, 성의재 북편에 전사청이 있다. 내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안향선생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한때 안향의 영정이 도난당했다가 찾은 적이 있다. 전사청에는 제향에 필요한 제기 일체를 보관하고 있으며 성의재는 강당이자 서당으로 1950년대 초까지 이곳에서 안승춘이 동네아이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과거 전사청 자리에는 합호서원 관리인들이 거주하던 집이 있었으며, 제향을 올리러 온 유림들이 이곳에서 숙박을 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41호로 지정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