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姓)·입향성씨(入鄕姓氏) 16)경주김씨(慶州金氏) 8

풍채가 좋고 의기 당당했던 김경여

2014-06-27     김진우

김경여의 공의 휘(諱)는 경여(慶餘)이고, 자(字)는 유선(由善)이다.

공은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인품은 헌걸차고 풍채는 뛰어나 우뚝하게 산악(山岳)과 같은 기상(氣象)이 있었고, 다른 사람과 말할 적이면 음성과 얼굴빛은 즐겁게 했지만 뜻을 세우기는 견고하고 곧게 했다. 자신의 몸가짐을 방정하고 엄격히 했고, 침착하며 조용하고 말이 적으며 묵직하게 점잖고 단정하며 씩씩하므로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에 대해 가하다고 허여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함께 마음으로 칭찬하는 남의 말에 대해서는 마음을 기울여 정성을 보이며 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유복자(遺腹子)라서 부자(父子)가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을 항상 지극한 슬픔으로 여겨 제삿날에는 슬퍼함이 곁의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날마다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사당에 배알(拜謁)했으며, 모부인(母夫人)을 섬김에 있어 뜻과 물품을 잘 갖추었고, 청렴 결백한 한결같은 지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평생 동안 한 점의 먹을 허비하면서 글자를 써 준 적도 없었고, 다른 사람 또한 감히 사사로이 요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몸이며 마음과 일을 함에 있어서 깨끗하게 결점이 없었다. 그리고 죽고 사는 것과 화액과 복록에 이르러서는 운명이 하늘에 달려 있다고 여겼으니,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과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이후로 그의 심지(心志)를 두었던 바는 출처(出處)와 거취(去就)에서 나타난 것이 매우 분명하다.

공과 같은 분이야말로 진정으로 많은 풀 가운데 지초와 난초 같은 존재이며, 날씨가 추운 뒤에야 나중에 시드는 소나무와 측백나무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부인 이씨(李氏)는 충정공(忠定公) 이귀(李貴)의 딸로 부녀자가 닦아야 할 덕행(德行)이 있었다.

남(男)은 진수(震粹)인데, 벼슬은 현감(縣監, 종6품 수령)에 이르렀다. 사위는 둘인데 직장(直長, 정7품) 서진리(徐晉履)와 좌랑(佐郞, 6품 주무관) 홍득우(洪得雨)이다. 측실(側室)의 남은 진환(震煥), 진병(震炳)이다. 손자에 남은 효석(孝錫), 창석(昌錫), 중석(重錫), 명석(明錫)이고, 손녀(孫女)는 권성에게 출가했다. 외손(外孫)은 서문제(徐文濟), 서문환(徐文渙), 서문부(徐文溥), 서문택(徐文澤)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내가 공과는 주선(周旋)하며 왕래한 것이 거의 30년이다. 진출하고 은퇴함이 처음부터 끝까지 대략 서로 같아서 공을 상세하고 알고 공에게 깊이 심복한 사람으로는 의당 나 만한 이가 없다.

그의 의(義)를 행하는 아름다움과 논의하는 올바름은 진실로 이루다 기록할 수 없지만, 그의 명나라를 높이려는 대의(大義)는 해와 별처럼 빛났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더욱 밝혀졌는데, 그의 유소(遺疏) 한 편은 신명(神明)에게도 질정할 만하다. 그러므로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사림(士林)에서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서로 조문(弔問)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아! 공의 삶과 죽음이 어찌 세상의 도의에 관계됨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그가 죽음에 다다라 조용히 틈을 내어 정돈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기 때문에, 김 문경공(金文敬公)이 듣고서 훌륭하게 여기기를, “군자(君子)의 바른 임종(臨終)은 당연히 이와 같아야 될 것이다” 했으니 진실로 분명하게 알고 후하게 수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이는 도(道)를 아는 선비가 취해다 법을 삼아도 가하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생각컨대 송애는 아름다운 상서에 응해 태어났는데, 양육함에 있어 곤궁하게 기름을 두려워했지 외로움을 근심하는 적은 없었도다. 어려서부터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성취하겠나를 스스로 생각하여, 부지런히 공부하고 지식을 쌓아서 바로 그 명성을 떨쳤도다. 집안을 잘 가다듬고 편모를 효성으로 받들었으며, 친구들이 어질다고 해 나의 세 가지 좋아함을 갖추었도다. 처음 관리로 시험했을 적에 자신의 마음 다하기를 생각했으므로, 과거에 급제해 요직을 거치면서 양양한 전도는 붕새가 날 듯했도다. 깃을 모두 펴서 날지 못함은 시대의 어수선함이 그지 없어서였네.

명나라가 무너지니 인륜과 기강이 풀어지고 막혔기에, 나는 종적 거두어 돌아와 때묻지 않았네. 나의 호수에는 조용히 달이 밝고 나의 농사는 풍요롭고 무성하며, 시서(詩書)는 시렁에 가득하고 맛좋은 음식은 상에 올랐도다. 벼슬하지 않겠다는 것이 무슨 죄이기에 나를 역승(驛丞)으로 편입시켰도다. 한 마음 돌처럼 단단해 아홉 번 죽어도 더욱 꼿꼿하리. 사면함에 이르러서도 집요하게 나를 오만하다 했네. 해가 바뀌면서 자신은 여유가 있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