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창원유씨 시조는 고려때 유섭

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17) 기계유씨(杞溪兪氏) 2

2014-09-18     김진우

<창원유씨(昌原兪氏)>
창원 유씨(昌原兪氏)는 고려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 고려18품계 가운데 제5등급인 정3품 상계의 관계명)로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고려때 보문각의 정4품)을 역임한 유섭(兪涉)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시조의 선계(先系)는 문헌의 실전(失傳, 대대로 이어온 사적이나 묘를 알수 없게 됨)으로 자세히 알 수 없으며, 후손들은 창원에 정착 세거하면서 본관을 창원(昌原)으로 해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역사적 인물로는 시조 유섭(兪涉)의 아들 유경이 정당문학(政堂文學, 중서문하성의 종2품 재신)을 지냈고, 증손 유귀생(兪貴生)이 조선초에 공부전서(工部典書, 사도공이라고도 하며 정3품 장관)를 지내 유명했고,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 유상지(兪尙智)가 직제학(直提學, 홍문관, 예문관의 정3품, 집현전의 종3품)을 지내 명성을 떨쳤다.

유상지의 아들 유조(兪造)는 봉상시정(奉常寺正, 국가의 제사를 주관하고 추증과 시호를 제정하는 일을 담당한 관청의 벼슬이 정임, 으뜸 벼슬은 경으로 정3품관 2인을 둠)을 역임해 가문의 번성을 이뤘다.
명종 때 효자로 명성을 떨쳤던 유언겸(兪彦謙)은 문화현령(文化縣令, 종5품수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됐다. 호조참판(戶曹參判, 종2품 차관)과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유수는 2품 지방장관)를 지낸 유창과 그의 아들 유득일(兪得一)은 대사헌(大司憲,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검찰총장)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 정2품 법무장관)에 이르렀다.

경종 때 형조판서(判書, 정2품 법무장관)와 공조판서(工曹判書, 정2품 장관)를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 70세 이상의 정2품 문관을 예우하기 위해 태조, 숙종, 영조도 함께 들어가 군, 신이 함께 한 원로회의)에 들어간 유집일(兪集一)등이 명성을 떨쳤다.

유집일(兪集一, 1653∼1724년 ,자는 대숙은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유정(兪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여해(兪汝諧)이며, 아버지는 현감(종6품 수령)을 지낸 유근(兪瑾)이다.
1680년(숙종 6년) 진사(進士)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 나라에 경사있을때 대궐에서 보던 과거)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 뒤 지평(持平,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4품 부장검사)이 됐고, 1694년 김시걸(金時傑), 이인병(李寅炳), 류상재(柳尙載) 등과 함께 양사에 제수됐으며, 이어 장령(掌令, 정4품 검사)이 됐다. 장령으로 있을 때에 지평 김시걸과 함께 옥(獄)의 사체(事體)를 분명히 할 것을 청했다.
또한, 위접관(慰接官)으로 대마도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했고, 1696년 승지(承旨,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에 임명됐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觀察使, 종2품 도지사), 황해도관찰사, 대사간(大司諫, 사간원의 으뜸 정3품) 등을 거쳐, 1705년 예조참판(參判, 종2품 차관)이 됐다.
1718년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내고, 1720년 숙종이 죽자 산릉도감(山陵都監,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침을 조성을 관장했던 임시 관서)의 제조(提調, 각 사, 원의 관제 상 우두머리가 아닌 종1품, 또는 종2품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겸직으로 임명되고, 그 관아의 일을 지휘, 감독하게 했음)를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 외에도 장령(掌令,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정4품 부장검사)을 거쳐, 필선(弼善,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인 세자시강원의 정4품)을 지낸 유신일(兪信一)과 영조 때 사마양시(司馬兩試)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관찰사(觀察使, 종2품 감사, 도지사)를 거쳐 대사헌(大司憲,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창총장)에 오른 유숭(兪崇)이 창원유씨(昌原兪氏)의 가문을 빛냈다.

<유여눌을 입향조로 하는 창원시 창원유씨(昌原兪氏)>
고려 중기에 유여해(兪汝諧)는 이부상서(정3품 장관)로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시조가 됐다. 그의 아우이자 창원 입향조(入鄕祖) 유여눌(兪汝訥)은 호부상서(尙書, 정3품 장관)를 지냈는데 회원군(檜原君, 회원은 창원 고호)에 봉해져 회원을 관향으로 삼게 됐다.

회원현이 조선 전기에 창원부로 승격되면서 창원유씨(昌原兪氏)가 된 것이다. 후손들이 창원에 이거(移居)해 살면서 본관을 창원으로 해 세계(世系)를 이었다.
창원유씨(昌原兪氏)는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관대작을 많이 배출했다. 그로 인해 전국 각지에 분포하게 됐고 경기도 화성, 오산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시조의 아들 유경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을 지냈고, 증손 유귀생(兪貴生)은 조선 초에 공부전서(典書, 정3품 장관 후에 정2품 공조판서)를 지냈다.

현손(玄孫, 고손자) 유상지(兪尙智)는 1405년(태종 5년)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승정원(承政院, 청와대 비서실)의 좌부대언(左副代言, 왕명의 출납과 숙위 및 군기의 정사를 관장한 벼슬로 좌부승지를 고친것), 집현전의 직제학(直提學, 종3품으로 도승지가 겸임) 등을 지냈으며 국사(國史)를 감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