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 조선3대 여류시인 임벽당 김씨
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17) 기계유씨(杞溪兪氏)-6
유여림의 아우 유여주(兪汝舟)는 중종 때 조정암(趙靜庵)이 주장해 설치한 현랑과(賢良科)에 선발됐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후 향리(鄕里)인 비인(庇仁)으로 낙향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부인 김(金)씨는 유여주(兪汝舟)의 아호를 따서 임벽당김(林碧堂金)씨라 하는데, 신사임당(申師任堂), 허난설헌(許蘭雪軒)과 더불어 조선조 3대 여류시인(詩人)으로 꼽힌다.
유여림의 아들 유강(兪絳)은 중종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던 과거시험)에 급제해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의 정3품)와 대사간(大司諫, 왕의 잘못을 간하던 사간원의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중추부의 정3품 당상관)를 거쳐, 대사헌(大司憲,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현재의 검찰총장)에 이르렀다.
그는 사은사(謝恩使, 우리나라에 호의를 베풀었을 때 사례하기 위한 사신)가 돼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병조참판(兵曹參判, 종2품 국방차관)과 한성부판윤(判尹, 정2품 서울시장), 공조, 호조판서(戶曹判書, 정2품 장관)를 두루 역임해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특히 유강(兪絳)은 외직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인재를 모아 글을 가르쳐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관서의 유생(儒生)들이 중앙에 진출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문하(門下)에서 훌륭한 제자가 많이 배출됐다고 한다.
유강(兪絳)은 부정을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이어서, 당시 외척 권신인 윤원형(尹元衡)을 논핵하다가 여러번 지방 관찰사(觀察使)로 축출되는 등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는데 윤원형이 죽은 뒤 중앙에 복귀해 한성판윤(判尹, 2품 서울시장), 형조판서(법무장관), 호조판서(判書, 품장관)를 지냈다.
유강(兪絳)은 스스로 “30년 입조(立朝)에 한 번도 권세 있는 집 문전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다”는 말로써 자손들에게 올바른 몸가짐에 관한 교훈을 남겼다.
<광주 검단산 하산곡리 유씨마을>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 3등공신(平難三等功臣)으로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던 유홍(兪泓)은 유여림의 손자이며 생원(生員) 유관의 아들로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가 태조 이성계의 기록을 잘못 기재해 고치게 한 일)에도 공을 세워 광국1등공신(光國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우의정(右議政, 정1품 정승)을 거쳐, 좌의정(左議政, 정1품 정승)에 이르렀으며, 당대의 석학(碩學)인 남명 조식(曺植)에게 극찬을 받았다.
유홍(兪泓)은 한양이 함락되고 유홍(兪泓)은 왕비를 해주(海州)로 피신시킨 뒤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유대술(兪大述)과 유대건(兪大建)형제가 아버지의 묘(墓) 경기도 고양(高揚)에서 廣州(광주) 검단산(黔丹山) 기슭으로 이장하고 이 마을에 터를 잡아 살았던 것이 하남시 하산곡리(下山谷里) 유씨(兪氏) 마을의 시작이다.
경기도 하남시 산곡동에 거주하는 기계유씨는 ‘산골유씨’로 부른다. 지금은 경기도 하남시로 통합돼 있지만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광주군 동부면 하산곡리였다. 이곳은 기계유씨 최대 집성촌으로 최대 200여 가구가 넘게 살았다고 한다.
충목공 유홍(兪泓)이 나라에 공을 세워 산곡동의 땅과 노비 비단 등을 하사받았다. 그 뒤 후손들이 400여년을 살고 있고 같은 마을에서 20촌 가까이 벌어진 경우도 있다. 이곳을 한 번도 타성(他姓)에 넘겨준 경우가 없고, 현대인물로 유기준 국회의원, 유성근 의원 등을 배출했다.
이곳 기계유씨를 산골유씨라고 부르는데 원래는 산곡인데 골 곡자를 쓰기 때문이다.
<출처-한국인의 역사, 향토문화대전>
지금은 경기도 하남시이나,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광주군 동부면 하산곡리는 위아래 마을로 기계유씨 최대 집성촌이었다.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下山谷洞)은 상산곡동의 대칭어로 산곡리가 갈라지면서 붙은 이름이다.
이곳은 상산곡이 중부면으로 편입될 때 동부면이 됐다.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 새능 기계유씨 묘역내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유무증(兪懋曾)의 묘갈명(墓碣銘)이 있는데,충청 5현(賢)으로 추앙된 시남 유계가 지었다.
묘갈명(墓碣銘)은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기안군 유공묘갈명 병서(有明朝鮮國嘉善大夫杞安君 兪公墓碣銘 幷序)공의 이름은 무증(懋曾)이요, 자(字)는 여성(汝省)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씨로 돼있다.
유무증(兪懋曾) 묘갈명(墓碣銘)은 1663년 후손들에 의해 광주(廣州)옛 관아 동쪽 부사(負巳)에 건립됐다. 유무증(1580~165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1646년(인조24년)에 공신회맹(功臣會盟)에 참가해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당상관 품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