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병자호란 때 인조 호위한 유무증

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17) 기계유씨(杞溪兪氏)-7

2014-10-30     금강일보

<유무증(兪懋曾) 묘갈명-가선대부(종2품 품계)로 기안군에 봉군된 유무증과 정부인(2품외명부 작호)이씨 묘갈명(墓碣銘)>

유무증(兪懋曾, 1580년~165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기계(紀溪), 자는 여성(汝省)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위하고, 이듬해 선릉참봉(參奉,종9품 벼슬)이 됐다.

이후 활인서(活人署, 도성 내의 병인을 구료하는 일을 맡은 관아)의 별제(別提, 정, 종6품 잡직 무록관이나 360일을 근무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길 수 있었다. 무록관은 녹봉을 지급받지 못하던 관리)와 안협현감(縣監, 종6품 수령) 등을 거쳐 첨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3품 당상관) 겸(兼) 오위장(五衛將, 종2품 무관)에 이르렀다.

유무증 묘갈명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上山谷洞)은 조선조 때는 동부면 산곡리였다. 일제가 강점 후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산곡리의 대성(大姓)이며 조선조의 명문가인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세력을 분리하기 위해 이곳을 중부면에 귀속시키고 위쪽의 산곡이라 해 상산곡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경기 하남시 덕풍1동 역말은 고려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이곳에 역(驛)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역촌(驛村)에서 역마을, 역마을에서 역말로 변해 굳어진 지명이다.

이런 기계유씨 집성촌(集姓村)인 하남시에서 2009년 현재 그 후손이 조상의 유훈을 받들어 회자되고 있다. 그 주인공은 하남농협의 유병훈 조합장으로 솔직담백한 성격으로 대인관계가 좋은 유 조합장은 누구보다 14대(代)째 하남에서 살고 있는 하남을 잘 아는 하남 토박이이다.

12~13대 조합장으로 살림을 총괄하고 있는 그는 8년 동안 꾸준한 발전을 이끌어 하남농협의 새로운 도약 기반을 구축하고, 조합원에 대해 겸손하고 봉사하는 자세와 뛰어난 리더십으로 조직을 효율적으로 이끌어 오늘의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유억겸묘(墓)-유길준 아들 문교부장관>

유억겸 묘
유대수(兪大修)는 선조 때 주서(注書, 승정원의 정7품)와 전적(典籍, 성균관의 정6품)을 거쳐, 형조, 호조, 예조의 좌랑(佐郞, 6조의 정6품)을 지내고,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지방관을 규찰하던 5품) 등 10년간 외직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유대칭은 ‘이몽학(李夢鶴)의 난’때 홍주목사(牧使, 정3품 수령)였던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 돈령의 친밀을 꾀하기위해 설치된 관아인 돈녕부의 종2품) 유대일(兪大逸)의 아들 유백증(兪伯曾)은 성품이 강직하기로 유명해 말직에만 머물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때 공을 세워 정사3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고 사간(司諫, 사간원의 종3품)으로 있으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탄핵하여 충박신(忠朴臣) 또는 유충박(兪忠朴)으로 불리웠다.

그가 경상감사(監司, 종2품 관찰사)로 나가 윤선도(尹善道)의 실정(失政)을 논박했고, 대사간(大司諫, 왕에게 간하던 일을 맡아하던 사간원의 정3품)으로 있을 때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 행정안전부장관) 이성구(李聖求)를 물러나게 했으며, 이조참판(參判, 종2품 차관)으로서는 좌의정(左議政, 정1품 정승) 홍서봉(洪瑞鳳)을 ‘묵상(墨相)’이라 혹평하고, 하옥(下獄)을 청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총관(副摠管, 오위도총부의 종2품)으로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扈從, 어가를 뒤따르며 시종함)해 화의(和議)를 주장한 윤방(尹昉)과 김유 등의 처형을 상소해 파직되는 등, 강직한 척화파(斥和派)로서 누차 직언(直言)을 하다가 화를 당했으나,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어탑(御榻)을 붙들고 떼를 쓰며 늘어지기도 하여, 인조도 백증(伯曾)의 고집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고 하며 ‘유고집’이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