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모든것 충남학] (7)백제시대의 충남
백제 혼이 담긴 고도…문화유산 한류 시작됐다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철기시대를 거쳐 강력한 중앙집권 형태 국가인 백제가 건국됐다. 특히 백제시대 때 충남은 공주와 부여를 중심으로 강력한 문화를 꽃 피웠고 비록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해당 지역에는 백제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이 대거 발견되면서 당시의 화려했던 시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전성기 시절의 백제는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던 고구려와의 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해 문화뿐 아니라 군사력에서도 뛰어남을 보였다.
또 북쪽의 고구려로 인해 중국과의 육상 교역이 어려운 상황에서 서해를 통한 해상 무역을 개척해 대륙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백제가 충남지역에서 갖는 의미는 상당하지만 사실 백제 역사를 통틀어 충남지역과 관련된 시절은 2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백제 초기부터 약 500년 정도 지금의 서울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하면 지금의 공주와 부여를 떠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백제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 한성, 즉 오늘의 서울 강남지역에 자리를 잡고 성립됐다. 백제는 약 700년 동안 이 지역에 도읍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라고 하면 대부분 공주와 부여를 떠올리는 것이 대개이다. 백제가 자랑하는 문화적 발전, 대외적 영향력이 공주와 부여 도읍 시기에 발휘됐기 때문이다.
당초 백제가 한성으로 도읍을 정했던 이유에 대해선 한강이 위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떤 문명이든 강을 끼고 있는 것은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했는데 세계 4대 문명을 돌아본다면 이해가 쉽다. 또 농경시대였던 당시 농사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는 것이 영토전쟁 만큼 중요했던 시절이기에 백제가 한강지역을 선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한강 이남지역에 터를 잡은 백제는 한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국가운영에 나섰다. 하지만 북에서의 지속된 고구려의 침공 등 견제로 인해 백제는 고구려에 비해 큰 발전을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환경에도 주변의 소국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록에 백제의 고도팽창을 경계하는 듯한 글귀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한반도 지역에 설치한 낙랑군을 통해 백제를 치게 했다. 당시 백제의 왕은 직접 군을 이끌고 낙랑군의 병사를 물리쳤고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특히 중국의 선진문물을 보유하던 낙랑군과의 계속된 전투로 인해 중국문물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백제는 화려한 유물들에 눈을 뜨게 됐고 이는 곧 백제의 화려함으로 연결됐다.
이처럼 백제는 계속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지만 개로왕(蓋鹵王) 시절 한성이 고구려에게 함락되면서 왕족과 귀족들이 거의 몰살되는 위기를 맞았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文周王)은 재기를 위해 새로운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공주를 최적의 지역으로 꼽았다.
당시 백제가 공주를 새로운 도읍지로 정한 이유는 방어상의 이점과 교통의 편의성, 생산성 등 세 가지 때문이다.
우선 공주의 경우 금강(錦江)이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했고 공산(公山)도 평지보다 약간 우위에 있어 평지가 대부분이었던 한성에 비해 방어가 편한 편이다. 특히 금강은 방어 뿐 아니라 수로를 통한 교역이 수월하다는 점 역시 강점으로 꼽혔다.
또 인접지역에 넓은 평야가 있어 농사를 짓기에도 유리했고 길을 닦는데에도 다른 지역보다 편하기 때문에 백제는 공주를 새로운 도읍으로 정했다.
하지만 고구려에게 패전한 뒤 도읍을 남하한 백제는 도읍 이전에 필요한 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공주의 지역유지들의 많은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역유지들이 한 나라를 재건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재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지만 지역유지들의 무덤이었던 수촌리고분을 보면 당시 공주의 지방세력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역 내에서 휘둘렀는지 가늠할 수 있다.
백제왕족이 지역유지들을 만나면서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도 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무덤문화가 크게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지역유지들의 무덤인 수촌리고분을 백제가 수용하면서 백제시대의 가장 큰 무덤으로 일컬어지는 무령왕릉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됐다.
공주 이전 초기에는 문주왕과 삼근왕이 단명으로 승하하는 등 어지러움이 계속됐으나 동성왕과 무령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국세를 회복하고 안정기반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무령왕은 고구려에 선제공격을 하면서 나름 성과를 거뒀고 대규모 간척사업과 수리시설 건설 등을 통해 농업을 독려하면서 경제적으로도 기반을 쌓았다. 이처럼 경제적 기반을 쌓은 백제는 본격적으로 해외교류에 나섰는데 남조와 일본 등과의 활발한 교류는 경제적 기반이 선제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점점 공주가 경제의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레 공주는 교통의 요충지가 됐고 아직도 전국에서 가장 많은 나들목을 보유한 지역으로 성장하게 됐다.
◆불교문화 전파한 백제의 부여 천도
경제적 기반을 갖춘 백제는 개로왕을 살해한 고구려를 향해 수차례 공격을 가하면서 나름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힘은 고구려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또 공주의 경우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더욱 크게 백제가 팽창하기 위해선 도읍 주변에 넓은 평야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성왕은 부여 천도를 결정했다.
부여로 도읍이 결정되면서 백제의 도읍은 공주 시절에 비해 더 바다 쪽에 가까워지게 됐는데 백제의 문화가 뱃길을 통해 문물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예산과 서산, 태안 등 서해안 지역에 백제의 불교문화가 전파됐다.
해당 지역의 불상들은 왕도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자연과 하나되는 자연미를 최대한 강조했다는 점이다.
가령 서산 마애삼존불상처럼 자연 속에 불상을 새기는 등의 형태가 대표적인데 일각에서는 오히려 화려한 유물들보다 자연스러운 서해안의 불상들이 더 백제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이 시절 형성된 백제의 불교문화는 방방곡곡으로 퍼졌는데 신라의 대표적 사찰이었던 황룡사의 9층석탑은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주관했다.
또 일본 고대 문화 개화에도 절대적인 기반이 됐다는 것 역시 불교문화가 이 시기에 얼마나 강성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실제로 부여천도를 단행한 성왕 때 백제의 불교는 일본에 전해지기 시작했고 588년 아스카에 세워진 일본 최초의 사원 법흥사가 백제의 후원에 의해 조영됐다.
5년 뒤인 593년에 조영된 오사카의 사천왕사는 부여의 사원과 동일한 구도로 돼 있다.
백제의 불교문화가 일본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냐는 아직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지만 제2차세계대전 때 많이 손상된 아스카의 절에서 실시된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백제의 가람배치와 일본의 그것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또 일본 일부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왕이 백제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볼 때 백제는 바다 건너 일본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충절의 고향 이미지 각인시킨 백제부흥운동
고구려를 견제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과 화려한 문화를 가졌던 백제는 결국 망국의 길을 걷고 만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7월 부여가 함락됐고 의자왕은 공주에서 붙들려 중국 낙양으로 끌려간 것이다. 모든 충절지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백제가 망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백제부흥운동을 펼쳤는데 여타 부흥운동과 다른 점은 백제부흥운동이 나름 성과를 거두면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특히 백제왕족의 피를 이어 받은 왕자 풍이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명분도 있었기 때문에 백제부흥운동은 초반에 거칠 것 없는 모습을 보였다.
백제 재건국을 이루려는 세력들은 예산의 임존성에서 의거했고 3만 명이 모여들기도 했다. 이들은 왜나라와의 협조를 통해 나당연합군을 무찌르려는 구체적인 전략까지 세웠으나 왜군이 당나라에게 괴멸당하면서 백제부흥운동은 한줌의 먼지처럼 흩날려졌다.
하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백제부흥운동은 충남을 중심으로 계속됐고 약 200년 후인 서기 900년 문경 출신으로 전라지역에서 장교로 근무하던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부흥운동을 선언해 후백제를 건국했다. 후백제는 개창의 변으로 “의자왕의 원한을 풀겠다”며 군사를 끌어 모아 약 40년 동안 유지됐다.
후백제는 궁예를 쓰러뜨리고 왕권을 장악한 왕건에 의해 다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당초 통일신라는 당시 백제가 망국이 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항전을 하는 모습을 보고 백제인들, 즉 충남지역민들을 가리켜 ‘훗날을 언제든 도모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시해야 한다’고 했다.
더욱이 고려 200년이 지나도 백제를 위해 목숨을 내비치는 모습을 보고 충절이 대단했다고 여겼다.
백제의 화려한 전성기 시절을 보냈던 충남지역이 충절의 고장으로 일컬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참고문헌 충남학의 이해, 충남의 정체성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