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모든것 충남학](13) 서천 유부도 갯벌
자연이 내어준 요새 …당나라 군대도 '쩔쩔'
해양 생물의 보고이자 바다 생태계의 근원인 갯벌. 캐나다 동부 해안, 미국 동부 해안과 북해 연안, 아마존강 유역과 더불어 우리나라 갯벌은 세계 5대 갯벌로 꼽힌다. 특히 서천에 위치한 유부도 갯벌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대상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어 금강, 계룡산과 더불어 충남 최고의 자연 유산 중 하나이다.
서천의 유부도 갯벌은 백제시대에는 천혜의 방어 요충지로, 이후부터는 농업에 필요한 주요 자원 등으로 사용됐다.
서천 유부도 갯벌은 지난 2009년 국내 13번째 람사르습지에 등록된 곳으로, 연안습지로는 전남 순천갯벌과 무안갯벌에 이은 세 번째이다. 충남 서천군 장항읍 서면과 비인면, 종천면 일원의 금강 하구 부근으로 면적은 15.3㎢에 달한다.
자연상태의 원시성이 잘 보존되어 있으면서 펄과 모래가 조화롭게 조성된 갯벌로 다양한 저서(底棲)생물과 풍부한 수산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일대에는 칠게와 벗들갯지렁이, 서해비단고둥과 같은 갑각류 및 연체동물 등 총 95종의 저서동물을 비롯해 어류 125종과 기타 수산생물 및 무척추동물 60종이 살고 있다.
그리고 갈대, 천일사초, 해홍나물, 칠면초, 갯잔디, 갯쇠보리 등 다양한 염생식물과 사구식물 44종 등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검은머리물떼새와 황조롱이, 노랑부리저어새, 마도요, 흑부리오리 등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과 같은 희귀 조류의 서식처로 보전가치가 뛰어나 지난 2008년 1월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바 있다.
원래 인근 갯벌은 기벌포(伎伐浦)라고 불렸고 과거부터 유배지로 매우 유명했다고 한다. 유부도라는 지명은 과거 임진왜란 때 한 부자가 범선을 타고 피난을 가다가 배가 뒤집어지면서 헤어지게 됐는데 부자 중 아버지가 이 섬에 도착했다고 해서 조선시대 때부터 불리기 시작했다. 인근 북서쪽 방향에 위치한 작은 섬은 아들이 휩쓸려 왔다해서 유자도로 불리고 있다.
◆충남지역 곳간의 대표로
인근에서 곡류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먹는 것으로만 모두 소비하지 못했던 지역민들은 이를 술의 원료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서천이 자랑하는 소곡주의 시초라고도 할 정도로 쌀 등이 아주 많이 재배됐다고 한다.
택리지에서도 서천에 대해 ‘인근 갯벌로 인해 땅이 기름지고 바다와 맞닿아 쌀과 소금 등을 생산하는데 유리하며 진강(금강 하류)변에 닿아 있어 그 이익은 전국에서 첫째이다.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해 뱃길의 편리함도 한양보다 못할 바 없다’고 설명해 인근 갯벌로 인해 서천지역이 기름진 땅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 일본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한산 일대를 유명한 곡창지대라고 표현했고 때문에 왜구가 남해안을 넘어 자주 이곳을 침범했다고 한다. 실제로 왜구들은 수탈을 위해 금강을 따라 올라왔다고 하는데 한산 일대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곡식들이 있어 왜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전해진다.
유부도 갯벌이 충남을 곡창지대로 이름을 날릴 수 있도록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이다.
◆자연이 선물한 백제의 방어요충지
유부도 갯벌은 방어선의 역할도 든든히 했다.
갯벌이 많은 특성 상 적군이 침투하기 힘들기 때문에 과거 백제는 유부도(기벌포) 갯벌을 하나의 방어선으로 이용했다. 인근 지역은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성(泗批城)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는데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 논산의 득안성과 함께 군사상(軍事上) 최후의 보루 역할을 당당히 해낸 약속의 땅이었다.
기벌포가 처음으로 역사적 조명을 받는 사건은 백제시대 때이다.
659년 신라가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또다시 원병을 청하자 이듬해 당의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에게 수륙군 13만 명을 주어 백제를 치게 했다. 당의 최정예군사들인 이들은 백제의 군사상 거점지역인 기벌포를 신라군과 함께 동시에 백제를 협격해 백제의 1차 방어선을 물리친 뒤 합세하여 사비도성으로 진격키로 작전을 세웠다. 우선 당은 수군으로 기벌포를 공격하고 신라는 동쪽에서 육로로 진격한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의 왕인 의자왕(義慈王)은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귀양가 있던 신하 흥수(興首)에게 계책을 물었다. 이에 흥수는 “당병은 수가 많은 동시에 군율이 엄명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해 우리가 대적한다면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기벌포는 주요한 지역이니 용사를 가려서 지키게 한다면 당병들은 백강(금강)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진언했다. 하지만 의자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기벌포에 대해 “당군이 연해안을 따라 기벌포로 들어왔지만 해안이 진흙탕이어서 다닐 수 없음으로 버들자리를 펴 군사들을 나오게 할 정도”라고 해 존재 자체로도 충분한 백제의 방어선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부터 신라를 지켜준 갯벌
기벌포는 백제 뿐 아니라 삼국을 통일한 신라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고구려까지 멸망시켰고 신라가 결국 삼국을 통일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신라까지 복속시키려 하면서 신라를 공격했고 결국 연합군은 와해돼 두 나라는 전쟁을 벌이게 됐다.
이에 당은 육로로 신라의 한강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676년 11월 금강 하구 기벌포에 설인귀(薛仁貴)가 지휘하는 당 함대를 침입시켜 신라의 측면을 공격했다.
기벌포는 백제의 수도인 부여 방어를 위해 중시되던 지역으로 바다의 만(灣)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이다. 당은 기벌포를 장악해 신라를 남북으로 갈라 놓고 절반으로 갈라진 신라군을 차례차례 공격할 의도를 갖고 무리하게 기벌포로 진격했다.
초반에는 물량을 퍼부은 당나라가 신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갯벌로 인한 진입의 어려움 등으로 스물 두 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결국 신라가 승리하면서 당나라를 기벌포에서 패퇴시켰다. 이 전투로 인해 신라는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낼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얻었고 결국 대당전쟁(對唐戰爭)은 기벌포 갯벌로 인해 신라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고려시대 이후 시작된 간척사업 시작
고려시대 들면서 갯벌은 염전과 농경지로 간척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유부도에는 하나 둘 염전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당시에는 대규모 간척사업이라기 보다는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쌌던 소금을 생산하기 위한 소규모식 사업이 주를 이뤘다.
본격적인 간척사업이 시작된 때는 조선시대를 지나 대한제국 시절부터 였다.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면서 곡물 등을 수탈해가자 부족해진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됐다. 1917년 공유수면매립법이 공포되기 시작했고 근대적인 간척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1960년대 국토종합개발사업은 자연환경 개조의 내용을 포함하는 수자원 개발을 중심으로 한 다목적댐 건설, 농지개발사업, 간척지 조성 등이 주를 이뤘다. 특히 농업용수개발을 위해 금강하굿둑이 조성됐지만 이를 통한 쓰레기의 유입으로 인해 갯벌은 몸살을 앓고 있는 상태이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