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 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광주이씨(廣州李氏) 6
칠원 성주였던 시조 이자성 " 왕건에게 굽힐수 없다" 항거
광주이씨가 시조로 받드는 이자성(李自成)은 칠원(漆原)에서 살아온 호족의 후예로 칠원백(漆原伯, 칠원은 현재의 경남 함안)에 봉군돼 성주(城主, 성의 주인)의 작위를 세습했다고 한다.
‘광주이씨 대종회’와 ‘한국인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조상들이 신라 때 칠원에서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신라가 고려에 손국(遜國)해 천년사직을 고하자 신라의 모든 성(城)이 왕건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유독 칠원 백성들만이 성을 굳게 지켜 절의(節義)를 높여 항복하지 않고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만을 왕(王)으로 섬길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며 항거하자 크게 노한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성을 함락시켜 칠원성주(漆原城主)의 일족을 회안(淮安,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이주시키고 고을의 호장(戶長, 고을아전의 맨 윗자리, 다른 기록은 역리로 삼았다고도 함)으로 복역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회안의 이속(吏屬)으로서 세대를 이어오다 고려 말에 이르러 광주에 세거하던 이당(李唐)이 과거에 응시해 생원(生員, 소과의 종장에 급제한 사람)이 됐으며, 이당(李唐)은 광주유수(廣州留守, 지방장관 2품 벼슬)의 딸과 혼인해 5형제를 두었는데 5형제가 각각 ‘1세조’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광주지방 노비들 중에서 이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이 높다고 알려지면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줘 고려말에 이르러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됐는데 한음 이덕형을 비롯해 광주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대부분이 이 당의 후손들이다.
‘조선의 건국(建國)과 토착세력(土着勢力)’ 이라는 성남시지초(城南市誌抄) 에는 “광주지방(廣州地方)에서 그 대표적(代表的)인 존재(存在)를 이 당(李唐)과 이 집(李集)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광주목인물조(廣州牧人物條)의 이 집(李集)을 보면 이당(李唐)은 본주(廣州)의 관리(官吏)이다. 근칙(謹飭, 공손하고 삼가다)해 현행(賢行)이었다. 다섯 아들이 모두 등과(登科)했는데 집(集)은 그 둘째 아들이다. 초명(初名)은 원령(元齡)이고 고려 충목왕(忠穆王)때에 등제했는데 문장(文章)과 절개(節介)가 세상에 알려졌다”고 기록돼 있다.
이 당(李唐)이 주인인 수령의 딸과 혼사를 맺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 말에 광주고을의 한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걸터 앉아있었다.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보니 자기의 아전인 이 당(李唐)이 나무 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있던 터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원님은 벙어리 딸을 그에게 시집 보내기로 결심했다.
날짜를 잡고 혼수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채단 끊는 사람이 가위를 잃어버리고 쩔쩔매고 있었다. 이때 벙어리 신부가 갑자기 말문이 터져 “문틀 위에 가위가 있다”고 말을 하자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겨 원님에게 알렸고 원님은 용꿈의 신통함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신랑신부가 혼례를 올리고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어려서부터 주위에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이 아들 다섯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했고 아전의 자식으로 5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했다.
5형제 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李集)으로 고려 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됐다.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