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 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광주이씨(廣州李氏) 7

이덕형,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

2015-04-23     금강일보
▲ 한음 이덕형(1561~1613년)묘역.

경기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된 한음 이덕형 묘역 규모는 336㎡이며, 묘역은 청계산(淸溪山) 서쪽으로 뻗은 형제봉(兄弟峯) 줄기의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단분(單墳)으로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은 화강암 석재를 이용해 원형으로 호석(護石)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있다.

묘비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이 배치됐고, 장대석을 이용해 횡으로 쌓은 계체석(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계절을 받치는 큰 돌) 아래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자석(童子石)과 문인석이 배치돼 있다.

묘비는 대리석으로 앞면에 ‘영의정문익공한음이선생덕형지묘 증정경부인한산이씨부좌’라는 명문이 있으며 묘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지었다.
묘역은 1984년 새로 단장됐는데, 호석과 계체석은 새로 조성된 석물이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역 아래 300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방형의 화강암 기대(基臺)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를 올린 것으로 이수의 조각이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비문은 조경(趙絅)이 글을 짓고 오시구(吳始口)가 글씨를 썼으며, 정규상(鄭奎祥)이 전액(篆額, 전서체)을 해 1653년(효종 4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는 20세에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하고 23세에 호당(湖堂, 세종 때 재덕을 갖춘 문신을 뽑아 ‘사가독서’시켜 오로지 공부만하게 하던곳, 독서당이라고도 함, 호당에 드는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김)에 들었으며, 31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大提學, 홍문관, 예문관의 정2품 문형)이 됐고 38세에 우의정(右議政, 의정부 정1품 정승), 42세에 영의정(領議政, 정1품 정승)에 올라 큰 명성을 떨쳤으며 이는 조선 역사상 최연소 기록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에 들어가 탁월한 외교수완을 발휘해 5만의 원병을 끌어들여 서울수복에 수훈을 세웠으며 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덕형의 유택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이밖에 중종때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하고 명종 때 우의정(右議政, 정1품 정승)을 거쳐 선조 때 영의정(領議政, 정1품 정승)에 오른 동고 이준경이 광주이씨를 빛낸 인물이다.

이외에도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 중 체포돼 순국한 이수택(李壽澤)과 을사조약 후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직한 이백래(李白來), 3·1운동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종훈(李鍾勳) 등이 선비의 가문 광주이씨(廣州李氏)를 크게 빛낸 인물들이다.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이극배(李克培) 묘갈명(墓碣銘).

7명의 왕을 섬긴 광릉부원군 이극배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이극배(李克培)와 묘역 동쪽에 그의 후손 이세충, 이수겸 묘역들이 있다.
조선 세종 때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7명의 왕을 섬기면서 도덕정치를 실천한 광릉부원군 이극배(李克培,1422년∼1495년)와 그 후손들의 묘이다.

이극배(李克培)는 세종 29년(1447년) 사마시(司馬試, 생원, 진사시험)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그해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 마다보던 정기과거)에 정과로 급제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큰 공을 세워 좌익공신 3등에 기록되고, 이어 광릉군에 봉해졌다. 1459년 북방의 야인(野人, 여진족)정벌 때 신숙주의 종사관(從事官, 각 군영 등에 딸린 주장을 보좌하던 관직)으로 출전했으며, 1462년부터 이조·예조·병조·형조의 판서(判書, 정2품 장관)를 두루 역임했다.

성종 10년(1479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1품)가 됐고, 1481년부터 2년 동안의 흉년이 발생했을 때에는 진휼사(賑恤使, 흉년이 들었을 때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중앙에서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아치)로 활약했다.

성종 16년(1485년) 정1품 정승인 우의정(右議政)이 됐고, 1493년 영의정(領議政, 정1품 정승)에 임명됐으나, 노병을 구실로 사양했으며, 다시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다. 묘역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에 있으며, 이 가운데 이극배의 묘(墓)는 연산군 1년(1495년)에 조성된 것으로 부인 경주 최 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묘(墓) 앞에는 묘비·상석·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좌우로는 문인석(文人石), 무인석이 각 2쌍씩 있다.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연산군 2년(1496년)에 세워졌는데, 비문(碑文)은 명필가로 유명한 예조판서(判書, 정2품 장관) 겸 예문관의 종2품 제학(提學) 신종호가 지은 것이다. 머릿돌에 새겨진 특이한 구름무늬와 비문의 서체, 정교한 석공기술은 커다란 예술적, 기술적.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