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 모든 것 충남학](25) 내포문화

충청도 최고 명당, 정치·경제 핵심으로

2015-07-21     김현호 기자

 

 

 

▲이중환의 '택리지'

 


충남의 문화가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이 존재하는 가운데 면밀히 살펴보면 충남지역 내에서도 서로 상이한 문화권이 설정돼 있다. 충남의 서해안지역과 내륙지방은 언어를 시작으로 음식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때문에 생활문화 역시 서해안인 내포권과 내륙인 금강권으로 나누는 것이 대표적이다.


두 문화권은 조선 후기 같은 유교문화를 공유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내포권에서의 유교문화와 금강권에서의 유교문화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양 문화권이 배를 이용한 교통수단을 이용했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한 쪽은 서해, 한 쪽은 금강이라는 교통로를 이용했다. 내포지역은 바다를 선진문물의 유입 매개로 이용했고 내륙지역은 금강을 해안가의 특산품을 옮기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내포문화와 금강문화를 각 한 차례 씩 살펴본다.

◆기록마다 다른 내포
내포(內浦)라는 말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지만 각종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이전부터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무한천에서 덕산 경계까지 가는 길이 12리이니, 곧 내포로 왕래하는 대로이다’라고 기록돼 있어 과거부터 내포라는 지명이 사용됐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보다 훨씬 앞서 고려 때에도 내포라는 지명을 당시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데 ‘고려사(高麗史)’에서 ‘기사(己巳)에 왜가 내포에 침구해 병선 30여 척을 부수고 여러 지역의 재물을 약탈했다’고 나와 있다. 당시의 기록은 고려 공민왕 때의 기록으로 예전부터 내포라는 지명이 사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내포라는 지역에 대해서만 서술돼 있을 뿐 상세한 기록이 없고 조선에 들어서야 구체적인 구역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기록마다 내포를 포함하는 지역이 상이하다.

조선상식(朝鮮常識)에 따르면 ‘내포라 함은 충청도 서남우의 가야산맥을 잇는 여러 마을로 삽교천의 상류,…(후략)’이라고 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충청도관찰사가 바닷조개 백 개를 바쳤는데 비인과 내포에서 생산된다’고 했다. 충청도에서 바닷조개가 생산되는 곳은 보령과 남포, 비인, 홍주 결성 등이다. 영조실록(英祖實綠)에는 또 ‘내포 18개 고을이 이미 적지로 판명됐으니 백성을 안집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처럼 각 기록마다 내포가 정확히 어느 구역인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택리지에는 ‘충청도에서 내포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쯤에 가야산이 있고 서쪽은 큰 바다이며 북쪽은 경기의 바닷가 고을과 큰 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동쪽엔 큰 들판이 있다. …(중략)… 가야산 주변 고을들을 내포라 한다’고 서술하고 후반부에는 ‘가야산 서쪽의 결성, 해미, 가야산 북쪽의 태안, 서산, 면천, 당진, 가야산 동쪽의 홍주, 덕산, 예산, 신창 등 10개 고을 내포라 한다’고 정의했다.

◆문화수용의 창구인 내포
비록 기록마다 내포에 대한 지역을 정확히 서술하고 있지 않지만 모두 서해안지역이라는 공통점은 갖고 있다. 내포는 서해안을 끼고 있는 지역이어서 대륙과 연접한 북쪽지역을 제외하고는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던 지역이다.

이는 해상왕국인 백제시대에도 보이는 성향으로 백제는 당시 해양교통을 발달시켜 중국과의 교류를 지속시켰다.

이와 관련한 당시의 기록은 현재 찾기 힘들지만 현존하는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사면석불 등은 이 곳 내포가 중국 선진문물이 수입되는 경로였단 점을 대변해준다. 해당 불상들은 사람 이상의 키를 가진 거대한 규모의 불상들로 이러한 불상제작은 백제의 수도가 있던 공주나 부여 어디에서도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다만 돌로 된 불상 제작기술은 대륙으로부터 전수 받았다고 추측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때에도 내포는 해양교류의 중심역할을 했다. 당진이라는 지명이 이 때 생긴 것인데 당나라와의 교류진지를 뜻하고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는 태안 이 씨, 서산 정 씨, 소주 가 씨, 절강 편 씨 등이 이 시기에 내포로 입향했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주교가 들어오기도 했다.

이처럼 선진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지역인 탓에 이곳에는 항상 장시와 보부상들이 존재하게 됐다.

호산록(湖山錄)에 따르면 ‘서산지역에 장시가 들어섰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서산과 비슷한 규모로 성장하고 있던 홍주나 예산에도 비슷한 규모의 장시가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국 장시의 소재지를 기록한 임원경제지에는 내포지역에만 30개 정도의 장시가 들어섰다고 했다.

내포에서의 보부상에 대한 존재도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당진 출신의 보부상인 유진룡은 “약 20명의 보부상들이 덕산장을 다녔다. 이들은 장까지 선두다툼을 벌이며 길을 걸었고 그래봐야 5분 차이지만 빠를수록 ‘한 수’를 더 받았다”고 구술했다. 비록 5분 차이로 버는 돈이 상당했다는 그의 발언을 볼 때 덕산장이 여간 크게 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서유학 최후보루인 내포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학자는 안향(安珦)이고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보급한 학자는 충선왕을 따라 대륙을 다녀온 백이정이다. 이후 뒤를 이어 이색, 정도전 등이 주자학을 이념적 무기로 활용해 조선이라는 국가를 세웠다. 충남지역에서는 이색이 대표적인데 서천 한산 출신인 그는 이지함, 이산해 등과 함께 보령과 예산에서 이름을 떨쳤다. 이 외에도 내포지역에는 사육신인 성상문을 비롯해 이개, 김구, 서기 등 많은 유학자들이 활동했다.

내포지방의 유학은 기호학맥을 잇는 경향이 뚜렷하다. 기호학통은 율곡에서 김장생으로 정통이 이어지는데 김장생의 아들 김집과 함께 호서·호남지방에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김장생의 뒤를 이어선 회덕의 송시열, 송준길이 있었고 청풍의 권상하로 이어지면서 조선후기 기호유학이 조선유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홍성의 한원진과 최징후, 예산의 윤봉구가 이름을 떨치면서 내포지방은 기호유교의 정통성을 띠는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이들은 호서지역에 거주했기 때문에 이들의 학문을 호서유학이라고도 불렸고 추후 호락논쟁에서 이들이 주장한 내용은 호론으로 불렸다.

호서학파의 학통은 내포의 한원진에 의해 계승돼 내포지방은 나중에 호론의 중심지로 되면서 홍성과 예산, 보령, 서산 등지에 크게 영향을 줘 남당학파를 이루게 됐다. 이는 위정척사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의 사상적연원이 됐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참고 ‘충남학의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