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 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 성씨(入鄕姓氏)
18) 광주이씨 25
이이두(李以斗, 본관은 광주, 자는 서칠, 호는 서파)는 조선 후기 칠곡 출신의 문신(文臣)이다. 만각재(晩覺齋) 이동급(李東汲) 후손이며 이헌운(李憲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함양 박씨 부인은 강진 안씨, 경주 최씨이다.
1807년(순조 7년)에 태어나 1828년(순조 28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해 1866년(고종 3년)에 입시(入侍)했다가 장릉(章陵, 조선 제16대왕 인조의 아버지로 추존된 원종과 그의 비 인헌왕후 구씨의 능으로 사적 제202호, 참봉)에 임명됐다.
1869년(고종 6년)에 의금부의 종5품 도사(都事), 헌릉의 직장(直長, 정7품)에 임명됐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맵시가 총명하고 뛰어나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문학에 정명(精明)해 생전에 남긴 원고가 있다고 전한다.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달서리 석문(옛날 돌문을 세웠던 곳이라 마을 이름을 석문이라 했다) 안산에 있다. 이병연(李炳淵, 본관은 광주, 자는 문거, 호는 금호)은 조선 후기 칠곡 출생의 유생이다. 좌랑(佐郞, 정6품)을 지낸 이기중(李沂中)의 현손(玄孫, 고손자)으로 아버지는 이이엽(李以曄)이고 어머니는 풍양 조씨, 부인은 청주 정씨이다.
1828년(순조 28년)에 태어나 재주와 사람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 무리에서 뛰어나 세 번이나 천거돼 태학(太學) 장의(掌議, 조선 시대에 성균관, 향교에 머물러 공부하던 유생의 임원 가운데 으뜸 자리)로 뽑혀 성균관의 알성강(謁聖講)에 참여해 강론하고 상(賞)을 받았다.
고종 때 소(疏) 사건으로 용천(龍川)으로 귀향을 가게 되자, 사림(士林)에서 정사(精舍)를 지었다. 귀향을 끝낸 후에는 임천(林泉)에 은거해 후학에게 학문을 권장했다.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가 있다고 전해진다.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송정리 도당동에 있다.
사헌부 지평(대검 검사) 역임한 이신영
이신영(李臣榮, 본관은 광주, 자는 원실, 호는 춘계)은 조선 후기 칠곡 출신의 문신(文臣)이다. 아버지는 학서(鶴栖)이상선(李相善)이고, 어머니는 전주 최씨, 부인은 여강 이씨(여주 이씨)이다.
1838년(철종 4년)에 태어나 1870년(고종 7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1886년(고종 23년)에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해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사헌부의 정5품 지평(持平, 대검찰청 검사)을 역임하고, 벼슬은 홍문관의 정·종5품의 청요직인 교리(校理)를 지냈다.
1892년(고종 2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가 제문(祭文)에서 “늙은 잣나무 가지와 잎에 파리하게 서리가 씌웠어도 눈썹먹 빛은 수백 년 지나도 하루 같네” 라고 했고, 창번(蒼樊) 이이건(李以鍵)이 뇌문에서 “그릇은 호련(瑚璉)이요 재목은 녹나무이니 이륜(彛倫)을 두텁게 할 만하고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킬 만하네” 라고 했다. 시문(詩文)을 모아서 엮은 책이 있다고 전한다.
묘소는 경상북도 칠고군 왜관읍 삼청리 오수동에 있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가 제문(祭文)을 지었다. 이채연(李采淵)은 조선 말기 칠곡 출신의 문신(文臣)이다. 아버지는 증(贈)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이봉(李以鳳)이며, 어머니는 김녕 김씨, 부인은 인동 장씨, 성주 배씨이다.
조선말 개화정책 수행 참여한 이채연
1861년(철종 12년) 칠곡군 왜관읍 봉계리에서 태어났다. 1886년(고종 2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해 제중원주사(濟衆院主事), 미국공사서의 번역관, 주차(駐箚) 미국서기관, 선공감(繕工監)의 별제(別提), 단성(丹城) 현감(縣監, 종6품 수령), 전우국방판(電郵局幇判)을 역임하고, 1894년(고종 31년)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 마다 보던 정기과거) 갑과에 급제 공조참의(工曹參議, 정3품 차관보),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인 동부승지(同副承旨), 하동부사(府使, 정3품 수령),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중추원의 정3품 당상관), 경기도관찰사(觀察使, 종2품 감사), 궁내부의 특진관(特進官, 경연에 참시해 왕의 고문에 응하던 관직), 아문부총재, 시종원경, 귀족원경을 거쳐 김홍집 내각의 농상 2부 협판(協辨,차관)으로 개화정책의 수행에 참가했다.궁내부 대신 등 여러 벼슬을 거쳐 한성판윤(判尹, 정2품 서울 시장)을 아홉 번이나 역임하면서 서울의 도시계획을 처음으로 입안했다. 1896년 한성판윤으로 독립협회 창립에 참가했으나 독립협회가 정부 시책을 규탄하자 탈퇴했다.
묘지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 호명산(虎鳴山)에 있다. 이상철(李相喆, 본관은 광주, 자는 윤길, 호는 아산)은 조선 말기 칠곡 출신의 유생(儒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