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의 시조한담] 박계숙과 금춘의 사랑

중부대 교수

2016-02-21     금강일보

 

박계숙의 자는 승윤 호는 반오헌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 부훈련원정·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 순종공신이 되었다. 임란 때 일등공신 박홍준의 아들로 수훈을 세운 무관이기도 하다.

박계숙과 그의 아들 취문이 변방에 부임하면서 쓴 일기가 ‘부북일기(赴北日記)’이다. 박계숙의 일기가 24장, 그의 아들 취문의 일기가 55장 모두 79장으로 되어있다.

거기에는 ‘초심사석(初心似石)’이 ‘여금춘동침(與今春同寢)’으로까지 풀어가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비록 대장부라도 간장이 쇠가 돌이겠느냐
뜰 앞의 예쁜 여인 경계를 삼았더니
성중의 호치단순을 잊을 수가 없구나


……어제 저녁 어둠을 틈타 와본즉 “많은 손님들이 있어서 돌아갔나이다.”라고 말하거늘, 더불어 이야기하며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다. 남아의 탕기로 반년이나 집을 떠나 있으니 어찌 춘정이 없겠는가.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잊고 춘정을 이기지 못하여 붓을 들어 한 수 시를 지어주다

을사 12월 27일 세밑, 돌과 같은 마음이 서서히 녹아감을 토로하고 있다. 성중은 관할 구역이다. 호치단순은 아름다운 여인을 말한다. 예쁜 여인을 보고 경계를 삼았지만 아름다운 금춘을 보니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당우도 친히 본 듯 한당송도 지내신 듯
고금 이치 통달한 명철인 다 어디 두고
동서도 분별 못하는 무인 사랑주어 무엇하리


……이날 아침 애춘이란 애가 아름다운 금춘을 데리고 방에 들어오니, 그 아름다움이 옛날 서시의 아름다움이요 왕소군의 절색이라, 비단 옷을 입은 모습은 가을 구름에 숨은 달과 같고, 푸른 버들가지에 눈이 돋은 듯하며 연못에 비친 연꽃과 같았다.

금춘의 자는 월아, 노래를 잘하며 바둑도 둘 줄 알아 모르는 것이 없었고, 거문고와 가야금에도 능했다. 저녁이 되도록 이야기하니 어찌 능히 춘정이 없겠는가, 처음 먹었던 돌 같던 마음이 서서히 풀려간갔다.

기생 금춘의 화답이다. 당우(唐虞)는 당나라 미인 우미인을 가리키고 한당송(漢唐宋)은 나라 이름들이다. 훌륭한 재사, 문인들 다투어 정을 주겠다는데 동서도 구별 못하는 무인에게 정을 주어 무엇 하겠느냐는 것이다.

근엄한 척하지만 낙양성의 벌나비로다
광풍에 날려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변방의 예쁜 꽃가지에 앉아보고 싶구나


저절로 우러나오는 고백이다. 체면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나 역시 벌나비이다.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아름다운 당신의 꽃에 앉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아녀자의 짐짓 농담 대장부 믿지마오
문무가 일체임을 저도 잘 알고 있다오
하물며 늠름한 대장부께 정 아니주고 어쩌리


무신이고 무인이면 어떻습니까? 정말 날 아껴주고 사랑해준다면 여자로서 만족할 것입니다. 솔직하고 우직한 정부의 넓은 가슴이 그리운 아녀자입니다.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뜻이다.

박계숙은 금춘과 더불어 동침했다. 그들의 뜨거운 가슴은 북국의 설한풍을 녹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음은 그날의 일기이다.

이날 밤 나는 금춘과 더불어 베개를 베고 같이 잤다. 서로를 사랑하는 견권지정이 깊었다. 김공은 여자를 가까이 하는 일이 전혀 없었는데, 애춘이와 함께 사랑을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