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작업실, 602호] 덥지! 오싹하게 해줄까?
무더위 날려줄 '한국산 공포영화'
푸르스름한 영상을 뚫고 온몸에 피로 물들인 채 전기톱을 들고 있는 살인마가 나타난다. 그리곤 곳곳에서 터지는 관객들의 비명소리. 손에는 땀이 흥건해지고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공포영화를 보고 나면 짜증나는 한여름 무더위쯤은 까맣게 잊게 된다. 공포영화가 항상 여름철에 개봉하는 이유이다.
오늘은 냉방 잘된 극장이 아닌 집에서 한여름 무더위를 잊게 해줄 공포영화 몇편을 소개한다.
# 아직도 그녀가 학교를 다니고 있어
1. 여고괴담(1998)
치마를 입은 하얀 맨발이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면 스산하게 서있는 학교 건물, 불안한 얼굴로 교무 수첩을 뒤적이며 교무실에 혼자 남은 여교사 박기숙(이용녀 분)이 졸업 앨범에서 무엇인가를 확인 한 듯 전화를 걸어 ‘진주가 학교를 계속 다니고 있어’라는 말을 채 끝나기 전에 전화는 끊기고 곧 정체 모를 무언가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여고괴담’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로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했던 ‘최강희의 텔레포트’신은 관객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성적에 대한 압박감, 친구들 사이의 질시와 따돌림, 교사의 편애와 차별, 폭력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공포를 유발하는 기제로 삼고 있다.
이 영화에서 귀신보다 무섭고 끔찍한 것은 ‘학교’라는 공간이며 수십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교육제도 그 자체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반 평균이나 떨어뜨리는 놈’으로 멸시받고, ‘분식점을 해도 서울대를 나와야 장사가 잘된다’는 대사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학벌지상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시리즈는 ‘새로운 감독+새로운 배우+새로운 이야기’를 원칙으로 삼아 최강희, 김규리, 박진희, 박예진, 공효진, 이영진, 송지효, 박한별, 김옥빈, 서지혜, 오연서 등을 배출하며 여배우들의 등용문이라고 불린 적도 있었다.
# 이 집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2. 장화, 홍련(2003)
인적이 드문 시골, 이름 모를 들꽃들이 소담하게 피어 있는 신작로 끝에 일본식 목재 가옥이 홀로 서 있다. 낮이면 피아노 소리가 들려 올 듯 아름다운 그 집은 그러나,어둠이 내리면 귀기 서린 음산함을 뿜기 시작한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서려 있는 이 집에서 어른도 아이도 아닌 아름다운 두자매. 수미.수연이, 아름답지만 신경이 예민한 새엄마와 함께 살게 된 그날. 그 가족의 괴담이 시작된다.
두 딸과 계모, 아버지가 등장하는 전래동화 ‘장화, 홍련’의 괴담구도만 빌려왔을뿐 고전을 그대로 영화화한 작품은 아니다.
끔찍한 비밀이 으스스한 집 곳곳에서 숨죽이고 있는 가운데 아버지의 무기력한 방관 속 새엄마와 두 딸이 대립하는 과정을 그렸다.
한국영화 중 미장센(간단히 말하자면 관객이 보는 스크린 안에 담긴 공간 구성)이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집안 인테리어를 통해 자매의 심리가 드러난다. 소녀의 우울함을 꽃무늬 벽지와 대비시켜 날카롭게 신경을 긁어대고, 앤티크 풍의 가구들은 음침한 색깔과 어두운 조명과 어울려 음흉한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우리가 ‘집’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안전함이라 안락함 대신 자칫하면 가장 공포스러운 공간이 될 수도 있음을 미장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 손에 피를 묻힌 자, 돌아갈 수 없다
3. 알 포인트(2004)
1972년 2월 2일 밤 10시. 이날도 사단본부 통신부대의 무전기엔 "당나귀 삼공"을 외치는 비명이 들어오고 있다. 6개월 전 작전 지역명 ‘로미오 포인트’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18명의 수색대원들로부터 계속적인 구조요청이 오고 있었던 것. 부대는 그 병사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을 확보하기 위해 부대는 수색대를 편성하고 소대장 최태인 중위는 부대원 9명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지만, 그들은 ‘손에 피를 묻힌 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섬뜩한 비문을 보게 된 후, 대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끔찍한 일을 차례로 겪게 되는데….
베트남전을 소재로 열악한 상황에 내던져진 인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심리 공포물로 밀림 속에서 서서히 미쳐가며 하나씩 죽어가는 대원들의 끔찍한 이야기를 독특한 분위기로 그려냈다. 첫 병사가 죽은 뒤 무전기로 “1명이 죽어 9명 남았다”고 보고하지만 “너희는 원래부터 9명이었다”는 본부의 답을 들은 뒤부터 공포스러운 상황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뭔가에 홀려 이성을 상실한 대원들이 서로 총을 겨누는 과정을 통해 사지에 몰린 인간의 광기와 나약함을 보여준다.
# 신비롭고 매혹적인 환상특급
4. 기담(2007)
동경 유학 중이던 엘리트 의사 부부 인영(김보경)과 동원(김태우)은 갑작스레 귀국하여 경성 최고의 서양식 병원인 ‘안생병원(安生病院)’에 부임한다. 이들은 병원 원장 딸과의 정략 결혼을 앞둔 의대 실습생 정남(진구), 유년 시절 사고로 다리를 저는 천재 의사 수인(이동규)과 함께 경성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경성을 흉흉한 소문으로 물들인 연쇄 살인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어느 날 자살한 여고생 시체, 일가족이 몰살한 교통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10살 소녀가 실려오고 병원엔 음산한 불경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저마다 비밀스런 사랑을 품고 한 곳에 모이게 된 이들은 다가오는 파국을 감지하지 못한 채 서서히 지독한 사랑과 그리움이 빚어낸 섬뜩한 사건과 마주하게 되고, 경성을 뒤흔든 비극의 소용돌이가 점점 더 그들 앞에 옥죄어 오는데….
1940년대의 경성, 이 곳에 세가지 사랑이 싹튼다.
의대 실습생 정남과 자살한 여고생 시체와의 사랑, 한쪽 다리를 저는 의사 수인과 그의 치료를 받는 10살 소녀환자 아사코와의 사랑, 그리고 동경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의사 부부 인영과 동원과의 사랑이다. 안생병원에서 시작된 이들의 비정상적인 사랑은 균열을 일으키고, 때맞춰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기담’에서는 신체 절단이나 핏빛 가득한 원초적 두려움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서 사랑의 비극이 빚어내는 ‘슬픈 공포’를 선보인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지독한 사랑은 때론 비극적인 결말을 불러올 수도 있음을 환기시킨다.
국내 호러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숨겨진 수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한국 공포영화로서는 드물게 미학적 성취를 이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사진제공=네이버 영화>
박동규 기자 admin@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