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운의 우문우답] 지금은 행복하면 안 되나

논설위원

2019-04-04     김도운 기자

다들 기억할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매년 학기 초만 되면 선생님들이 들어와서 똑 같은 말을 한다. “지금 너희들 때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야.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너희들의 인생이 바뀌는 거야.” 그 이야기가 초·중·고 졸업하면 끝나는 줄 알았더니 웬걸. 대학에 가도 사회에 진출해도 그 말은 늘 따라 다녔다.

반백 년을 살았지만 지금도 먼 훗날의 행복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 아이들 잘 가르쳐 놓지 못하면 평생 고통스럽다고. 지금 노후 준비 해놓지 않으면 노년이 돼서 고통스러워진다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아니 그렇게 살았기보다는 그렇게 살 것을 주문받고, 강요받았다. 우린 늘 지금은 고통스러워야 하고 그래야 미래가 달콤하다고 배웠다. 다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약도 없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언제 올지 모를 행복을 기다리며 살았다. 지금의 행복은 거짓 행복이고 앞으로 다가올 행복이 진짜 행복이라는 착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행복은 크고 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됐고, 노력하지 않고, 고생하지 않고 얻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는 생각도 갖게 됐다. 이는 한국인만 갖는 독특한 행복관이다.

왜 이런 독특한 행복관이 생겨났는지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5000년간 지속된 가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민족은 5000년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가난의 굴레를 벗어던진 적이 한 번도 없다. 음식을 마음껏 먹고 따듯한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된 것이 불과 반세기도 안 된다.

민족 역사상 처음 호의호식이란 걸 하고 있다.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고, 배고픔에 시달리며 수천 년을 살았다. 너무 어렵게 움켜잡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마음 한구석은 늘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언제 다시 또 춥고 배고픈 시절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누굴 만나든 고삐를 죄는 충고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지금 행복하면 훗날 불행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은 바로 이런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근면하게 일했고, 성실하게 공부했기 때문에 지금의 이 풍요를 누리는 것이고, 방심하면 다시 과거의 춥고 배고픈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불안감의 핵심이다.

그래서 누구랄 것 없이 늘 ‘공부하라’와 ‘일하라’를 입버릇처럼 주문하는 버릇이 생겼다. 부모들은 아이가 잠시라도 쉬는 모습을 보면 불안해한다. 학교에 가든 학원에 가든 통제된 공간에서 책을 붙들고 있어야 안심한다. 기업의 오너들도 직원들이 잠시 휴식을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고 울화가 치민다. 뭔가 일 하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이 런 것들은 한국인만 갖고 있는 독특한 특징이다.

한국인들은 행복을 즐기기보다는 행복하면 불안해한다. 가까이 있는 소소한 행복을 즐기다보면 뒤늦게 찾아올 정말 큰 행복을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반드시 물질적 풍요가 동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하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의 행복을 누릴 줄 모른다. 삶 속의 소소한 행복을 즐길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현재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고, 현재의 행복이 이어지면 평생 행복할 수 있는 것인데 그걸 두려워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며 한국인들의 의식을 조금씩 전환시켜주고 있다는 점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주 작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자는 ‘소확행’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확산되며 장착하고 있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을 일만 하면서 즐길 줄 모르고 살아온 기성세대들은 이런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불안해한다. 즐겁고 행복하면 불안감을 느끼는 버릇 때문이다. 행복의 의미를 바꿀 필요가 있다. 나중에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 올라가서 행복하겠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지금 행복한 것이 진짜 행복이다.

불안감을 버리고 과감하게 행복을 찾아 나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