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칼럼] 지도자의 조건
이영순 배재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바다를 떠돌며 겪은 고난과 시련에는 삶의 진리와 교훈이 담겨 있다. 그 중에서 아에올로스와 헬리오스의 에피소드는 지도자의 조건과 덕목에 관한 이야기다. 포세이돈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오디세우스 일행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바다를 떠돈다. 그러다 간신히 아에올로스의 섬에 도착해 바람자루 하나를 얻는다. 자루를 건네주며 바람의 신 아에올로스가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자루를 열지 말라”고 당부한다. 덕분에 오디세우스 일행은 무사히 고향 가까이 도착할 수 있었고 고향이 눈앞에 보이자 긴장이 풀린 오디세우스가 그만 잠이 들고 만다. 반면에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자루에 보물이 들어있을 것으로 짐작한 부하들이 고향에 도착하면 오디세우스 혼자서 보물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가 잠이 든 틈을 타서 부하들이 바람자루를 훔쳐서는 꽁꽁 묶어둔 자루를 연다. 그 순간 거센 바람이 일시에 쏟아져 나왔고 오디세우스 일행은 강풍에 밀려 고향에서 더욱 멀어진다. 훨씬 가혹한 시련들을 겪은 끝에 오디세우스 일행은 이번에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에 상륙한다. 그 섬에는 태양신의 소들이 방목돼 있었는데 부하들이 신의 소들을 잡아먹는다. 오디세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부하들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목숨을 잃는다.
아에올로스와의 만남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예기치 않은 행운이나 기회를 대변한다. 고향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보물을 차지하려고 바람자루를 여는 바람에 귀향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이야기는 탐욕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힌다. 과연 그 뿐일까? 부하들의 욕심으로 고향에서 더욱 멀어진 것은 분명하나 부하들이 자루를 연 것은 자루 속에 바람이 들어있음을 몰라서다. 어째서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자루 속에 바람이 들어 있음을 말하지 않은 것일까? 정보를 독점하거나 은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부하들에게 자루에 바람이 들어있다고 말해준들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자루를 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정보의 독점이나 은폐는 불신과 의심을 양산하고 구성원의 양식을 믿지 못하는 지도자를 구성원들 또한 믿지 못할 것이다. 누군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믿을 수 있겠는가. 결국 바람자루가 열린 것은 오디세우스가 부하들을, 부하들이 오디세우스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그 불신의 뿌리는 부하들과 소통하지 못한 혹은 소통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던 오디세우스에게서 파생된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지도자로서의 또 다른 실책은 결정적인 순간에 잠을 자버린 일이다. 중요한 순간에 잠을 자고 있는 오디세우스는 태만하고 방심한 지도자 혹은 있으나마나한 무능한 지도자의 모습을 대변한다. 고향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오디세우스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더라면 부하들은 언감생심 자루를 훔쳐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리라.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부하들이 오디세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태양신의 소를 잡아먹은 이야기 역시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무절제함에 대한 경고의 이야기로 보이나 그 또한 구성원을 굶주리게 만드는 무능한 지도자는 구성원의 신망을 얻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