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전쟁사] 조선의 군제개혁과 북방 정벌 (4편)

2019-08-27     김경훈 인턴기자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설립되자마자 조선은 남쪽의 대마도를 정벌해 왜구를 토벌하고 중원의 패자 명나라, 만주의 여진 등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는 한편 직접 군사개입을 시도하며 안전한 국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고려의 지방분권적 성격의 군제를 개혁해 중앙집권적인 군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 조선 초기 군사제도 개혁의지와 역동적이었던 군사 활동에 대해 약 7회에 걸쳐 알아본다.

세종대왕

태종에 이어 즉위한 세종은 대북정세가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된다고 판단했고, 새로운 대북정책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우선 세종은 땅만 정복한다고 영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온전한 영토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민과 국경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지역 주민을 보호할 군사와 기지를 북쪽으로 이주 시킬 계획세웠으며, 황해도와 함경도는 농민이 군인을 병행하는 '의군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또한, 확고한 국경선을 만들기 위해서 영의정인 황희에게 현장탐사를 가라 명령하며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국경은 확고한 지형선이 있어야 방어에 유리함을 깨닳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국경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앞으로 조선의 국경선을 형성하게한 '4군 6진'이다. 세종은 4군 6진을 설치하기 앞서 이곳에 살고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야했고, 이에 여진정벌을 주장했다. 

하지만 현장답사를 다녀온 황희정승을 비롯한 신하들은 ‘농사에 좋은 땅이 아니다', '여진과 외교적으로 잘 지내면 된다’, ‘피는 피를 부른다’, 라는 이유를 대며 극렬한 반대를 한다.  과거 태종의 대마도 정벌 시 신하들의 반대에도 정벌을 강행했기에 원정의 목적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이종무 등 능력있는 무관들이 모함을 받은 것을 지켜본 세종으로서는 여진정벌 강행은 큰 위험이 따르는 결정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여도 전쟁과 국경선 확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혼자 할 수는 없으며, 마지못해 한 일이라면 대마도 정벌 처럼 희생양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세종은 4군 6진은 신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각자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총력전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정책임을 알고 이를 위한 공작을 시작한다.

세종은 대마도 정벌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조선군을 구한 이순몽 등 여러 무관들을 북방으로 배치해 여진족과의 전쟁이서 필요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수집하게 하고, 축성, 전투 등 각 분야에  전문가 집단을 만들어 중앙군에 배치한다. 그리고 지방에서 분란 발생 시 지방군으로 해결 가능한 경우에도 중앙군을 투입해 실전경험을 쌓게 했다. 전문가의 영역을 만들어 그 영역에 있는 자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것이다. 또한 전문가 외의 관료들이 이들을 견제하는 것을 방지해 양성된 전문가가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여진족 그림

또한 과거 북방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퇴직관리와 여진족과 전투해 본 퇴직무관들을 모아 여진정벌에 대해 논의를 한다. 당시 관리에는 정년퇴직의 개념이 없었고 퇴직과 현역복귀가 자유로웠던 시대였기에 퇴직한 관리와 무관들은 세종의 여진정벌에 찬성하며 자신이 참여하기를 청했다. 그러자 반대하던 현역신하들의 태도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다. 반대를 울부짖던 현직 관리들이 세종의 여진 정벌 및 4군 6진에 대해 찬성하며 토의를 거듭하며 온갖 의견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세종이 내부적으로 신하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위한 공작을 벌이고 있었을 때 여진의 내부적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었다. 본래 반유목·반농경이었던 여진족이 급격한 농경민족화가 진행된 것이다. 그러자 농경의 필연적인 부작용인 잉여 생산물로 인한 빈부격차과 그 부의 차이로 발생하는 계급사회화가 진행됐고 부의 척도가 토지소유의 유무로 변화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조선과의 크고 작은 전투로 인해 경제적 상황이 매우 불리해졌고 조선의 여진과의 무역금지조치는 여진 경제에 치명적인 피해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조선으로 귀화하는 여진족이 급증했고, 조선은 이들을 향화여진이라 명명했다. 조선의 정부는 이 향화여진에게 관직을 부여하고 살 수 있는 땅을 주며 귀화하지 않은 여진족들에서 조선에 귀화하면 대우도 받고 토지도 얻을 수 있다라는 선례를 보여주며 여진족의 귀화를 장려했다. 세종은 이런 일련의 일들을 장장 10여년간 천천히 진행하며 4군 6진으로 인한 내부적인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대비책을 세웠다.

4군 6진

여진사회가 경제적으로 불리해지고 사회가 불안해지자 장차 4군에 해당되는 강계, 여원 지역의 부족장 이만주가 조선을 침입해 일대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만주의 침입은 세종 입장에서 전면전을 주장하기에는 정치적으로 부담이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백성들의 약탈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논조로 조정회의가 시작된다. 최윤덕 장군을 비롯한 신하들은 분쟁을 일으키지 말자며 정벌에 반대했지만, 세종의 논리정연한 주장에 동조되 최윤덕 장군은 1000명의 인원이면 토벌이 가능하다며 찬성파로 돌아선다. 하지만 작전계획을 수립하며 그 인원은 점차 증가하더니 최종적으로 전면전이 가능한 1만명의 인원이 필요하다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에 세종은 1만 5천명의 병력을 제공하며1차여진 정벌을 허가한다.

조선군의 작전은 이만주의 부락을 동시에 점거해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이만주의 도주 및 반격을 방지할 수 있으며 이는 작전기한과 아군 피해정도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최적의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김경훈 인턴기자 admin@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