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전쟁사] 조선의 군제개혁과 북방 정벌 (6편)

2019-08-28     김경훈 인턴기자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설립되자마자 조선은 남쪽의 대마도를 정벌해 왜구를 토벌하고 중원의 패자 명나라, 만주의 여진 등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는 한편 직접 군사개입을 시도하며 안전한 국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고려의 지방분권적성격의 군제를 개혁해 중앙집권적인 군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 조선 초기 군사제도 개혁의지와 역동적이었던 군사 활동에 대해 약 7회에 걸쳐 알아본다.

4군6진

세종의 4군 6진의 목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고한 국경선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그 중 두만강의 경우 여진족에 대한 회유책이 성공해 안정화가 이뤄졌으나 압록강 일대는 이만주로 대표되는 부족들의 저항이 극렬했다. 1차 여진 여진정벌의 결과로 가족들이 살해당한 이만주는 4년간 6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입 하며 4군 지역의 조선인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1436년 5월에는 올량합 기병 500기가 침입해  남녀 14명을 납치하고 말 51필과 소 34두를 약탈했으며 조선군은 사상자 8명이 발생한다. 이들은 이듬해 재침입해 11명 살해한다. 

15세기 초  평안북도 주민들이 대부분 서쪽에 몰려 살았고 그 외의 지역은 무인 지대나 다름 없던 것을 감안하면 4군 지역의 주민들이 느꼈던 공포는 더 컸을 것이다. 또한 당시 중장비에 해당하는 말와 소의 이탈은 척박한 북쪽 땅을 개간하는데 뼈아픈 손실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4군지역에 조선인을 거주시켜 영토 확장과 더불어 국경선을 확립하려던 세종의 계획에 있어 주민이 공포를 느끼는 상황은 그리 달갑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오녀산성

그리하여 조선은 2차 여진 정벌을 계획한다. 1437년 평안도 절제사 이천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7800명으로 이만주의 거점인 오녀산성을 공격한다. 2차 정벌이 여진의 침입에 의해 급조된 공격처럼 보이지만 1차 여진정벌과 마찬가지로 만반의 준비를 하며 여진이 공격할 명분을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조선군은 2차 정벌 전 현대의 특수부대 격인 체탐자를 여러 차례 침투 시켜 공격지인 오녀산성 정찰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 결과 조선군은 1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은 반면 여진족은 46명이 살해당하고 14명 포로를 잡는 전과를 기록한다. 여진족의 피해정도가 생각보다 적은 이유는 세종이 학살과 같은 불필요한 살생은 원한만 쌓이니 적의 피해도 최소화하라 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세종의 최종계획은 국경지대의 여진족을 초토화 시켜 몰살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을 안정화해 4군 6진을 완성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위시한 국경선을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차 여진정벌을 통해 적대적인 이만주 부족을 몰아낸 조선은 4군을 설치한다. 4군의 저형을 보면 적국으로 돌출한 삼각형 모양이다. 이런 지형은 양쪽에서 공격받기 쉬운 지형이기에 앞으로 조선의 4군은 끊임없이 공격당했고, 급기야 1455년 4군 중 여연, 우예, 무창을 폐지하는 등의 어려움을 격으며 불안전한 영토로 그 지위를 유지한다. 그 후 4군이 완전한 조선의 땅이 되기까지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게 된다.

조선이 2차 여진 정벌 후 4군을 설치하자 6진 지역의 여진족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대표적인 친조선파였던 먼터무 부족이 불안감을 느끼고 명을 끌여들인다. 이로 인해 명은 조선을 견제하며 6진에서의 긴장관계가 심화된다. 명의 개입으로 6진의 정세가 답보상태가 지속되던 중 여진족간 내부 투쟁 이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 먼터부 부족의 추장과 아들이 모두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세종은 이를 기회라 판단해 군사를 동원해 6진의 핵심지역인 회령을 되찾고 기존의 국경선을 두만강으로 올리며 4군 6진을 완성시킨다.

 

김경훈 인턴기자 admin@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