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姓) 및 입향성씨-(4)부안임씨(扶安林氏) ③
불사이군의 충절 실행한 임난수
(사)뿌리문화 이사장
임난수는 고려 말기에 충남 공주에 낙향해 살던 충신이다. 1342년(충혜왕 복위3)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임숙(林淑), 어머니는 유씨(劉氏)이다.
부인은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최유(崔濡)의 딸로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맏이는 임모(林摹)로 수사(水使:수군절도사로 정3품 외직문관), 둘째는 임목(林穆)으로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지방관직으로 종3품), 셋째는 임서(林叙)로 충의교위(忠毅校尉, 중앙군인 5위(衛)의 충좌위(忠佐衛)에 소속됐던 양반 특수 병종으로 북계, 동계에 총 878명이 있었음)와 좌군사직(左軍司直: 고려때 전투시 부대 편제인 5군(軍)의 하나로 정5품)을 지냈다.
막내는 임흥(林興)으로 위의장군(威毅將軍, 조선 초기 서반(西班)의 정4품 하(下)의 품계)명으로 뒤에 소위장군(昭威將軍으로 개칭됨)을 지냈다.
임난수는 32세의 나이로 1374년(공민왕 23)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제주)를 정벌해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오른쪽 팔이 적에게 잘리자 잘린 팔을 화살통에 넣고 싸워 전승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흥복도감(興福都監,고려때 나라의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설치하던 관아), 녹사(錄事; 의정부, 중추원에 딸렸던 서리. 기록과 문서를 맡음), 낭장(郎將: 고려때 무관 정6품으로 별장의 위 계급), 호군(護軍:고려말에 정4품 장군을 고쳐부르던 이름) 등을 거쳐서 공조전서(정3품장관)에 올랐으나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자 한 하늘 아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공주로 낙향했다. 1407년 향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연기군 동면 합당리에 있다.
이후 이 지역은 부안임씨의 가전지지(家傳之地)가 됐다.
1682년(숙종 8) 우암 송시열이 고려 임장군신도비(高麗林將軍神道碑)를 세우고 “전서공의 몸을 지킴이 정몽주.길재와 같다”라며 불사이군(不事二君: 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충절을 실행한 충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출토유물 21점은 2010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에 기증됐다. 임서는 문중의 연기 입향시조인 임난수 장군의 3남이며 공민왕의 사위로 알려졌다.
현재 이들 유물은 부분적으로 훼손된 부위를 보존처리하기 위해 공주대학교로 이송·보관 중이다.
이들 유물은 조성시기가 분명한 분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조선초기 유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기증유물 전체는 향후 세종시에 건립되는 박물관 등에 보관 전시될 예정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은 2010년 12월 16일 건설청에서 부안임씨 사직공파로부터 기증받은 임서선생 및 그의 부인, 아들인 임중강의 묘 출토 유물의 기증증서와 감사패를 수여했다.
2010년 10월 19일과 25일 부안임씨 사직공파 문중의 요청으로 건설청의 분묘 이장작업을 참관하던 중 세종시대에 조성된 분묘 부장품인 청동거울, 청동합, 분청사기, 구슬 등 21점을 현장에서 수습했다.
현재 이들 유물은 부분적으로 훼손된 부위를 보존·처리하기 위해 공주대학교로 이송해 보관 중이다.
유물이 발견된 임서(林叙,1373~1436)는 문중의 입향시조인 임난수장군의 3남이며, 충의교위(忠毅校尉:5, 6품무관), 좌군사직(左軍司直:3군의 하나인 좌군의 정5품)을 지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공민왕의 사위로 부친의 뜻을 따라 불사이군(不事二君: 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자 아니함)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