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姓) 및 입향성씨-(5)하양허씨(河陽許氏)②

조선 침술의 대가(大家) 허임

2012-04-06     김진우
김진우
(사)뿌리문화 이사장

하양 허씨(許氏)가 배출한 인물 중 조선침술의 대가(大家)로 평가 받는 허임(許任.1570~1647)이 유명하다. 그는 선조임금과 광해군에게 직접 침을 놓았던 인물로 명의(名醫) 허준과 어깨를 나란히 한 침술의 대가이다.

허임의 출신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하양허씨세보에는 허락의 아들로 기록)에는 그의 부친은 허억봉 혹은 허억복이라는 이름의 악공(樂工)으로 관노(官奴)였고, 그의 모친은 사비(私婢)였다고 전한다.

허임의 부친이 관노가 된 배경은 그 시대로부터 약 1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허임의 조상이 겪었던 역사적 사건과 관계가 있다.

허임의 9대조는 세종대왕 때 좌의정을 지낸 문경공 허조(許稠)였다. 그러나 그 허조(許稠)의 아들 허후(허임의 8대조인 허눌의 친형)는 수양대군의 정권장악에 반대하다 귀양을 가서 교형을 당했다.

그 허후의 아들인 허조(허임의 7대조인 허담의 친형으로 허후가 자식이 없어 허눌의 큰아들 허조를 양자로 들였음)는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기도하다 발각되어 자결했고, 이에 연루돼 허조의 두 아들도 교형을 당했다.

그 당시 허임의 조상(허눌, 허담)도 그 사건에 연좌돼 괴산으로 유배, 관노로 부처됐다.
허임의 7대조인 허담의 묘가 충북 괴산에 있는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 후 허임의 조상은 줄곧 관노의 신분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허임(許任)은 노년에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에 정착해 현대 침술의 효시가 된 ‘침구경험방’을 저술했고 수많은 수제자를 길러냈다.

(사)허임기념사업회는 2009년 6월 18일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실에서 ‘침구경험방 간행 365주년 기념 세미나’를 개최, ‘침구경험방’을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날 ‘조선시대 鍼醫의 형성과 지위’에 대해 발표한 중원문화재연구원 이규근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침의의 범위는 침과 뜸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침구의뿐 아니라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외과적 수술 즉 대침(大鍼)으로 곪은 종기를 째고 고름을 뽑아내는 治腫醫도 침의에 속하며 單方의 膏藥 등의 약으로 외과적 질병을 치료하는 의원도 침의의 범위에 속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외과용으로 사용되던 대파침과 쌈지
이러한 침의들이 소속돼 왕실의 질병치료를 담당했던 침의청은 1651년(효종 2년)에 설치돼 왕실의 질병치료를 전담했다고하며 이후 내의원은 현종 14년(1673년)에 설치된 의약동참청과 함께 조선 말기까지 삼청체제로 운영됐고 침의청에 소속된 침의들은 전의감이나 혜민서에 배치된 침의들과 구분됐다.

중인신분에서 상위에 위치했던 의관 중에서도 침의는 피와 고름을 보는 수술법 등으로 질병을 치료한다는 점에서 內醫에 비해 사회적으로 천시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왕실에 대한 질병치료의 공으로 실직이 제수되는 등 관직으로는 내의들에 비해 차별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침의들이 소속돼 왕실의 질병치료를 담당했던 침의청은 1651년(효종 2년)에 설치돼 왕실의 질병치료를 전담했다. 이후 내의원은 현종 14년(1673년)에 설치된 의약동참청과 함께 조선 말기까지 삼청체제로 운영됐고 침의청에 소속된 침의들은 전의감이나 혜민서에 배치된 침의들과 구분됐다.

중인신분에서 상위에 위치했던 의관 중에서도 침의는 피와 고름을 보는 수술법 등으로 질병을 치료한다는 점에서 內醫에 비해 사회적으로 천시를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왕실에 대한 질병치료의 공으로 실직이 제수되는 등 관직으로는 내의들에 비해 차별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질병 치료에 있어서 많은 경험을 축적해 경험방 의서가 출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방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침구경험방’이며 그 저자인 허임도 침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