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2] 2. 중국 - 천안문광장 : 현대 중국의 상징 … 세계에서 가장 넓은 광장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2020-01-14     금강일보
자금성 전각들

북경여행에서 필수코스는 자금성(紫金城)이다. 천안문광장이 서울의 광화문광장이라면 자금성은 그 뒤의 경복궁인 중국 명~청 왕조의 황궁(皇宮)이다. 자금성은 명의 홍무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서 건국에 큰 공을 세웠던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장자상속제로 즉위한 2대 황제인 조카 건문제를 죽이는 정난의 변으로 즉위한 뒤, 1420년 난징에서 천도한 이래 현재까지 600년에 이르고 있다. 영락제는 지금의 베이징인 연경(燕京)에서 번왕으로서 다섯 차례나 몽골 원정과 베트남을 침공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편 인물이다. 자금성이란 본래 천제의 궁성이라고 전해오는 별자리인 자미원(紫微垣)에서 따온 이름으로 황제의 거처를 뜻한다.

천안문

천안문광장은 광장 북쪽 끝 자금성 입구에 육중한 돌로 쌓은 천안문(天安門)이 있기 때문인데, 천안문광장은 청 시대인 1651년 건설된 이래 네 차례에 걸쳐 확장되었다. 남북 800m, 동서 550m으로 44만㎢나 되는 거대한 광장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정부가 1958년 현재와 같은 대리석 포장을 했다. 바닥에 포장한 대리석은 집회가 열릴 때 군중 숫자를 게산하는 기준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 광장 한 가운데에 세워진 국기게양대를 중심으로 중국 각 지방도시의 거리측정 원점(原點)이라고 한다.

천안문광장 인민대궁정

인도에서 천안문광장으로 들어가려면 넓은 차도를 건너는 것이 매우 위험해서 지하도를 통해서 갈 수 있는데, 천안문광장의 동서남북에는 오늘날 중국을 알 수 있는 주요공공기관이 세워져 있다. 광장 중심에는 1958년 2층의 대리석 기단 위에 세운 인민영웅기념비는 국민당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낸 뒤 공산국가 완성을 기념하는 탑이고, 인민영웅기념비의 남쪽에는 중국공산당을 확립한 중국의 국부 마오(毛澤東·1893~1976)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마오 기념관(毛澤東紀念館)이 있다. 1977년에 준공된 마오 기념관은 중국정부가 가장 신성시하는 장소로서 매일 참배객이 줄을 잇고 있다.

천안문광장 역사박물관

또 광장 동쪽에는 1961년에 준공된 2개의 기념박물관이 나란히 있는데, 하나는 1919년 이후의 중국 공산당역사를 다룬 중국혁명박물관이고, 다른 하나는 1919년 이전의 중국역사를 보여주는 중국역사박물관이다. 광장 남쪽에는 명의 영락(永樂·1402~24) 연간에 세운 전문(前門)이 있고, 광장 서쪽에는 인민대회당이 있다.

우리의 국회의사당 격인 인민대회당에서는 매년 전국 인민대표대회가 열리는데, 1만 개 이상의 좌석을 갖춘 회의장과 5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연회당이 있다고 한다. 대규모 군중집회 장소로 이용하기에 적절하게 설계된 천안문광장은 1919년 이래 학생 시위대의 집회장소가 되어왔으며, 자금성과 함께 북경을 상징하는 곳이다.

내궁 석가산

역대 중국왕조는 대부분 북방에서 일어나 대륙을 통일했으나, 강남에서 일어나 중국대륙을 통일한 유일한 명의 영락제가 연왕(燕王) 때 왕성이던 연경을 둘러싼 내성(內城)으로 자금성을 만들었다. 동서 약 750m, 남북 약 1000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자금성의 성벽은 높이 10m, 총길이 3428m나 되며, 동쪽에 동화문(東華門), 서쪽에 서화문(西華門), 남쪽의 오문(午門), 북쪽에 신무문(神武門) 등 네 개의 문을 만들었다. 자금성 정문은 단문(端門)이지만, 이곳에서는 자금성의 입장권을 판매하고 두 번째 문인 오문을 통해서 자금성 안으로 입장한다. 오문이란 주역에서 남쪽이 말(午)을 상징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외성과 내성 사이에는 어느 나라의 어느 궁중이 그러하듯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해자를 팠는데, 그 폭이 52m, 총길이가 3800m에 이르니 웬만한 강의 너비만 하다.

태화전

자금성에는 궁전이 890채, 작은 방들은 9000여 개나 된다고 하는데, 오문에서 북쪽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건물배치가 되어 있다. 오문을 지나면 관리들이 출근하여 정사를 보는 공적인 장소인 외조(外朝)구역까지 태화문(太和門)·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등이 늘어서 있다.

특히 3층 흰색 대리석의 기단 위에 세워진 태화전은 동서 약 60m, 남북 약 33m의 건물로 우리 경복궁에서 임금이 정사를 보던 근정전과 같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그 뒤에는 황제의 개인 집무실 겸 휴게실이라고 할 중화전·보화전 등이 있고, 태화전의 동서쪽으로 문화전(文華殿)· 무영전(武英殿) 등 전각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문신과 무신들의 집무처이다.

교태전

그 뒤부터는 황제의 개인생활을 하는 내궁인데, 내궁은 외궁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작은 담장을 만들었다. 내궁은 보화전의 북쪽 건청문(乾淸門)에서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등이 있고, 그 좌우에 정비와 후비들이 거처하는 동서 6궁 등 많은 건물이 있다. 정비와 후비들이 거처하는 궁만 동쪽에 6개, 서쪽에 6개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특히 서6궁의 남쪽은 황제의 침실인 양심전(養心殿), 동6궁의 남쪽에는 황제가 제사 등을 지낼 때 근신하는 재궁이 있고, 동서 6궁 뒤에는 황태자들의 궁이 배치되어 있다. 그 뒤편으로 서6궁 서쪽에는 태후와 태비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건청궁

자금성 건물들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빛깔과 그밖의 건물과 담장은 중국 특유의 붉은 빛깔로 칠했으며, 이런 모든 전각의 현판을 한자와 청의 만주어로 함께 표기한 것은 무력으로는 명을 정복시켰으나 문화창조능력에서는 뒤떨어진 만주족이 한족의 문물을 그대로 수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금성은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세 살 어린 아기 때 황제가 되어 일제 침략 후 포로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던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자금성의 안팎이 자세히 소개된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런 근엄함이나 칙칙함은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고궁박물관 현판

다만, 이렇게 큰 황궁에서도 자객에 의한 황제의 암살을 두려워하여 나무를 심지 못하게 했다고 하니, 자금성을 둘러볼 때 그늘 찾기는 불가능하다. 자금성은 1925년부터 고궁박물원으로 일반에게 개방되었으며, 고궁박물원 현판은 자금성의 북문인 신무문 추녀 밑에 걸려있다. 자금성은 1987년에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경산의 명신종 자결비

그런데, 자금성 북문 길 건너에 있는 경산(景山)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곳은 금나라 때 자금성 밖의 북해공원을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쌓은 인공산(石假山)으로서 높이는 43m에 불과하지만, 북경 시내에서 가장 높은 산이어서 이 곳에 올라가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중국을 통일한 원제국이 황실의 정원으로 삼았으며, 명은 자금성의 해자를 개수하면서 파낸 흙으로 더 높이 쌓고 지금처럼 5개의 산봉우리를 만들어 만수산(萬壽山)이라 한다.

경산의 만춘정

만수산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봉우리마다 관묘정(觀妙亭), 주상전(周賞亭), 만춘정(萬春亭), 부람정(富覽亭), 집방정(輯芳亭) 등 5개의 정자를 세웠는데, 청 왕조는 만수산을 자원(紫苑)이라고 개칭했으나, 1655년 청의 순치제가 다시 경산으로 개칭했다, 일제가 1928년 일반에 개방하면서 경산공원이라고 했다.

경산의 만춘정

정문은 자금성의 북문 쪽인 만세문(萬世門)인데, 이 곳에서부터 경산의 꼭대기인 만춘정(萬春亭)까지는 자연석으로 만든 돌계단이고, 정상에는 부처상이 자금성을 내려다보고 있다. 정문의 왼편에는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신종이 1644년 이자성 태평청국 농민군이 북경을 침략하자, 자금성을 탈출하여 경산에서 불타는 자금성을 바라보다가 고목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한 곳에 표지석을 세워두었다.

그런데, 자금성 안은 물론 시내 곳곳에 누런 빛깔의 인민군복과 어울리지 않은 큰 테 두른 모자를 쓴 공안들이 떼를 지어 순찰하는 것을 보면, 치안이 상당히 불안한 것 같았다. 앳된 젊은 병사들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것은 우리의 1970년대 모습 같기도 했다.

<정승열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