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2] 4. 중국 - 이화원 :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별장, 서태후가 사랑한 별궁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2020-01-28     금강일보
만수산 불향각

북경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19㎞ 떨어진 이화원(頤和園)은 명~청대의 별궁(別宮)이다. 북경에 천도한 역대 중국황제들은 내륙인 북경 지역의 여름철이 매우 무더워서 비교적 저지대인 북경 서북쪽 교외에 궁을 짓고 이곳에서 여름을 보냈다. 이 일대는 저지대여서 크고 작은 연못이 산재하였는데, 청의 4대 성조 강희제(1661~1722)가 1689년 양자강 이남인 항저우(杭州)의 아름다운 서호(西湖) 풍경을 모방하여 창춘원(暢春園)을 만들었다. 

5대 세종 옹정제(1722~1735)는 창춘원의 북쪽에 동서 약 1.6㎞, 남북 1.3㎞의 원명원(圓明園)을 만들었고, 6대 고종 건륭제(1735~1796)도 원명원 동쪽에 사방 약 800m의 장춘원(長春園)과 그 동남쪽에 동서 1.1㎞, 남북 900m의 청의원(淸漪園)을 만들었다.

17공교

그런데,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북경까지 공격하면서 원명원, 청의원 등이 모두 소실되자, 1888년 서태후(西太后: 1835~1908)가 청의원을 복원하면서 자금성보다 네 배나 넓은 2.9㎢(88만평)로 확장하고 이화원이라고 불렀다. 드넓은 이화원의 3/4 이상은 삽과 곡괭이로 파낸 인공호수 곤명호(昆明湖)이고, 그렇게 파낸 흙을 쌓아둔 것이 높이 60m나 되는 만수산(萬壽山)이다.

서태후는 이 산 위에 자신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절 불향각(佛香閣)을 짓고, 곤명호 주변에는 수많은 전각들이 있는데, 서태후는 이화원 경내에 철로를 부설하고 프랑스에서 자신의 전용기차를 특별 주문해서 타고 다녔다고 한다. 

신해혁명 후 몰락의 길을 걷던 청은 1924년 마지막 황제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나자 이화원은 공원이 되었고, 1987년에는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곤명호 유람선

북경은 1965년부터 지하철 건설을 시작하여 2019년 7월 현재 22개 노선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이화원은 지하철 4호선 베이꽁먼짠(北宫门站)이나 서원역(西苑站)에서 내려서 A1출구로 나가면 되는데, 이화원이 워낙 넓어서 지하철 두 역 중 어느 곳에서 내려도 입장할 수 있다. 지하철요금은 매우 싸서 우리나라와 달리 거리 제한 없이 2위안(한화 340원)이다. 또, 시내 어디에서건 시내버스를 타고 이화원을 갈 수 있지만, 209번, 332번, 394번을 타는 것이 편리하다. 

북궁문 역에서 내리면 도보로 3분 거리에 이화원 북문이 있다. 이화원의 정문인 동궁 문(東宮門)에는 3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가운데 문은 어로(御路)라 하여 황제와 황후만 출입하고, 대신들은 양쪽 두 개의 문으로 출입하는 것은 우리의 궁성과 별 차이가 없다. 입장료는 경내만 둘러보려면 30위안(한화 약 5100원), 유람선을 타고 경내 시설을 모두 관람하려면 60위안이다.

이화원 입구

이화원이란 입구의 편액은 서태후가 옹립한 조카 광서제의 글씨라 하고, 이화원에는 인수전(仁壽). 낙수당(樂壽堂) 등 많은 전각들이 모두 붉은 기둥에 회색 지붕으로 조형이 특이하고 화려하다. 붉은 빛깔은 만주족의 특징으로서 자금성을 비롯한 중국의 모든 고궁은 한족이 사용하던 한자 이외에 만주족인 청의 문자를 병기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은 만주족은 물론 소수민족 55개 족을 아우르는 대륙의 주인임을 과시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이민족인 만주족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명백한 증표가 된다. 

인수전

인수전은 광서제와 수렴청정 하던 서태후가 정무를 보던 곳으로써 ‘어진 정치를 베푸는 자는 장수한다’는 뜻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비슷한 궁전인데, 인수전 뒤의 낙수당은 서태후의 침전이다. 낙수당 뒤편 동쪽 격월문에서 서쪽 석장정까지 728m의 행랑은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긴데, 이것은 서태후가 우천시에도 낙수당에서 만수산의 불향각까지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행랑이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것은 저승사자는 직선 길로만 다닌다는 중국의 전통신앙에서 저승사자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상해의 예원 구곡교(九曲橋)도 그렇다.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곤명호를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쌓은 만수산 위에 자신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불향각을 짓고 기원했다는 서태후의 후안무치가 놀랍기만 한데, 중국에서는 은(殷)의 마지막 임금 주왕(紂王)때 달기(妲己), 한 고조 유방의 아내 고황후(呂后), 당 고종의 황후이자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측천무후, 그리고 청의 서태후를 4대 악녀라고 한다. 

곤명호

거대한 인공호수 곤명호는 남해, 중해, 북해로 나눠서 삼해(三海)라고도 하는데, 회랑이 끝나는 곤명호의 동쪽 제방과 호수 중간에 만든 인공섬 남호도까지 150m의 아치형 다리는 17개의 아치가 있어서 17공교(十七孔橋)라고도 한다. 우리는 이화원 북문으로 들어가서 곤명호에서 배를 타고 청연방 돌배 앞에서 내린 뒤, 긴 행랑을 거쳐 낙수당, 인수전, 동궁문으로 나왔다. 이화원을 뒷문에서부터 돌아본 셈이다. 

곤명호의 한쪽 구석에 대리석으로 만든 길이 35m, 2층의 커다란 돌배를 청연방(淸晏舫)이라고 하는데, 돌배라는 의미에서 석방(石舫)이라고도 한다. 청연방은 ‘백성은 물이고 황제는 배인데, 물(백성)은 배(왕조)를 띄울 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도 있으나, 청 왕조는 반석과 같이 튼튼해서 물이 전복시킬 수 없음을 비유했다’고 하니, 이런 인식을 가졌던 청 왕조가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대륙을 첫 통일한 진시황제도 만리장성, 병마용 등 대규모 토목공사로 백성들을 혹사한 업보로 30년 만에 망하고, 양자강 대운하를 만들었던 수나라도 불과 15년 만에 멸망했는데도, 서태후가 이화원을 짓고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청일전쟁에서 패하여 쇠망의 길로 들어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행랑

서태후는 청의 9대 황제 함풍제(1851~1861)의 후궁이자 동치제의 모후였다. 그녀는 16살 때 입궁하여 21살 때 왕자를 낳고, 의귀비(懿貴妃)가 되었다. 그런데, 함풍제는 태평천국 난 때 정예병 팔기군(八旗軍)이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무너져 대륙의 절반 이상 점령되었는데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에 빠져 31살로 죽은 인물이다.

낙수당

함풍제 사후 의귀비가 낳은 유일한 아들이 6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여 동치제가 되면서 함풍제의 이복동생 공친왕은 대외업무를 총괄하고, 함풍제의 정비인 자안 태후와 동치제의 생모인 의귀비가 공동으로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내명부 서열상 정비인 동태후가 우위였지만, 의귀비는 황제를 낳은 모후였기에 정비는 자금성의 동쪽, 의귀비는 서쪽에서 각각 거처하여 동태후(東太后), 서태후(西太后)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동치제가 18살 때 천연두에 걸려 후사도 없이 갑자기 죽자, 3살밖에 안 된 조카 광서제가 즉위한 뒤에도 두 태후의 수렴청정은 계속되었다. 광서 7년 동태후가 갑자기 죽자 권력은 서태후에게 집중되었다. 동태후의 죽음은 당시 남성편력이 심한 서태후가 남자를 몰래 궁에 불러들여 즐기다가 임신한 것을 알고 동태후가 폐비를 논의하자 서태후가 독살했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서태후

서태후는 2년 전부터 자신의 환갑잔치를 거국적으로 준비하더니,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전멸하고 일본군이 대련 항에 상륙해서 살육과 약탈행위를 벌이고 있는데도 3일 동안 축하연을 벌였다고 한다. 1898년 24살의 광서제가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 개혁주의자들을 중용하여 변법자강 운동을 일으키자, 이들을 제거하고 광서제도 이화원의 인공섬 영대(瀛臺)에 감금하여 10년 만에 죽였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뒤를 이어 3살 된 부의(溥儀)를 선통제로 세웠지만, 선통제가 즉위한 바로 다음날 74세로 갑자기 죽었다. 누군가가 독살했다는 풍문도 있다. <정승열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