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 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姓) 및 입향성씨 6) 순천박씨(順天朴氏)(3)

박영규 이후 세계 알 수 없게 돼 충숙왕 때 박숙정을 1 세조로 받을어

2012-05-04     김진우

박팽년 유허비(대전시 문화재자료 제8호)
순천박씨(順天朴氏)는 신라 경명왕의 일곱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의 아들로 알려진 박영규(朴英規)를 1세조로 받들어 왔다. 그러나 박영규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온 묘나 사적을 알수없게 됨)되어 문중에서는 충숙왕때의 박숙정을 1세조로 받들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박영규가 승주(昇州:순천의 옛 지명)사람 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박영규(朴英規)는 후백제 견훤의 사위로 처음에는 견훤의 막하에 있었다. 그러나 견훤의 아들인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킨후 견훤이 고려로 투항하자 박영규(朴英規)는 아내에게 말하기를 "대왕이 40여년 동안 고초를 겪으며 공업(功業)을 이루었으나 일조에 집안의 화(禍)로 인하여 서실 곳을 잃고 고려로 투항을 하였습니다. 곧은 여인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군왕을 놔두고 적(賊)을 섬기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義士)를 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고려왕은 인후(仁厚)하고 근검(勤儉)하여 민심을 얻고 있으니 이것은 하늘이 계도한 것이므로 삼한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우리 왕에게 위안서신과 고려왕에게 은근한 뜻을 전하여 장래의 복(福)을 시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그의 아내는 “당신의 말은 나의 뜻이옵니다”라고 했다.

드디어 고려 태조 19년 2월에 박영규는 사람을 보내 서신(書信)을 전하고 또 “만일 의병(義兵)이 일어나면 내부에서 호응하여 왕의 병사를 맞이하겠습니다”고 하자, 태조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使者)에게 하사품(賜品)을 후하게 주어 박영규(朴英規)에게 돌아가 말하기를 “만일 당의 은혜를 입어 우리 병사가 가는 길에 아무 탈이 없으면 먼저 장군을 뵈옵고 또 마루로 올라가 부인에게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형(兄)으로 받들고 부인을 누나로 존경하여 반듯이 후한 보답을 하겠습니다. 천지귀신들도 모두 이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그 후 9월에 태조는 신검(神劍)을 정벌하여 후백제를 정복한 후 박영규(朴英規)에게 말하기를"견훤이 나라를 잃고 멀리 온 후 그 신하 중에서 한 사람도 위로를 한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경(卿)의 부부만 천리 길에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보이고 또 과인에게도 서신을 전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좌승(左丞:종1품 정승)을 제수한 후 밭 일천경(一千頃:300만평)과 역마 35필을 하사하고 그 가족을 맞이하였으며 두 아들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박영규는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할 때 부인 견씨와 함께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이어 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 때 정1품 문관의 품계)으로 좌승(左丞:좌정승, 종1품)에 올라 승주군(昇州君:승주는 순천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박영규는 왕건과 사돈을 맺어 자신의 큰 딸은 왕건의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이 됐다.
박영규의 후손인 박난봉(朴蘭鳳)이 고려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정승을 역임하고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평양은 순천의 옛 지명)에 봉해져 그를 득관조로 하였고 고려 충숙왕 때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보문각은 고려때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아 대제학은 그곳의 2품문형)을 지낸 박숙정을 1세조로 받들며 본관을 순천(順天)으로 하였다.

순천박씨(順川朴氏)의 인물을 보면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朴彭年). 박중림, 박계창, 박원종, 박기정 등이 있으며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가 낳은 비(婢)소년의 일화는 유명하며 박팽년의 후사가 간신히 이어진 그 일족을 ‘묫골박씨’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