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人] 이 시대의 엄석대는 누구인가?

최 일 정치부장

2020-12-10     최일 기자
1992년 개봉한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포스터

[금강일보 최일 기자] 나는 지금도 그들의 뒤를 이을, 아니 그들의 카리스마를 넘어설 인물은 없다고, 정확히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야구 경기를 봐왔고,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40년이 돼 가지만 선동열처럼 정교한 제구와 강력한 속구로 위압감을 주는 투수는 찾아보기 힘들고, 화려한 덩크를 구사하는 외국인 용병이 누비는 프로농구 경기를 아무리 봐도 허재 같은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선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우려는 순간, 허재처럼 승부의 추를 뒤엎을 수 있는 결정력을 가진 테크니션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예능인으로 변신해 허당 같은 이미지를 풍기지만…)

1980년대 후반 일약 강팀으로 비상했던 빙그레이글스(현 한화이글스) 팬들은 해태타이거즈(현 KIA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선동열이 마운드에 오르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어렵다’라는 체념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나 역시 그랬다. 선동열은 높은 벽이었다. 허재는 용산고·중앙대 시절부터 불세출의 스타였다. 농구대잔치와 국가대표 경기, 프로농구로 이어지기까지 그의 플레이를 보며 열광했다.

스포츠 분야에 국한된 얘기이긴 하지만 그들은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누구든 자신의 성장기에 즐겨 듣던 유행가를 나이가 먹어서도 흥얼거리며 “그 시절 노래가 좋았지”라고 하듯 선동열과 허재는 내게 야구와 농구 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 경험과 판단에 따른 나의 자의적인 생각일 뿐이다. “야구 하면 뭐니 뭐니 해도 OOO지”, “농구는 △△△가 넘버원이지”라며 이의를 제기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저마다 가슴 속에 품는 영웅들이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19라는 신종 전염병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2020년도 이제 채 끝을 향해 달려가며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려 한다. 훗날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해이고, 평소 연예인들만 착용하고 다닐 줄 알았던 마스크가 일상에서 온 국민의 필수품이 된 해로 기억되지 않을까?

2020년의 끝자락 국민들의 속을 끓이는 어수선한 정국을 보면서 불현듯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오래된 기억 한 편에 저장돼 있지만, 한편으론 현실과 오버랩 되며 가슴 한 편에 잠복해 있는 듯한 이름 ‘엄·석·대’가 바로 그것이다.

1987년 발표된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의 엄석대, 그는 왜 일그러져야만 했을까? 자유당 정권 막바지 한 시골 학교의 5학년생인 엄석대는 공부도 싸움도 잘하고 리더십도 뛰어난 반장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이 학교로 전학 온 주인공 한병태의 눈에 비친 엄석대는 온갖 부정·비리로 점철된 부당한 권력자였다. 한병태는 엄석대에게 반감을 품고 저항하려 했지만 이내 굴복하고 현실에 순응해 자발적인 손종·복종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새 학년이 되면서 기존의 불합리한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정의로운 교사가 출현하면서 엄석대의 실체가 드러났고, 그의 비정상적이고 폭력적인 권위가 힘없이 무너지는 순간, 엄석대는 “잘 해 봐, 이 새끼들아!”라고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교실을 뛰쳐나가 종적을 감춘다.

1987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표지

그런데 이 소설의 배경이 된 1959~1960년으로부터 6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2020년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엄석대는 우리 곁에 살아있는 것 같다. 4차 산업혁명을 논하는 지금 이 시대의 엄석대 역시 지체 높은 완장을 차고 리바이어던(Leviathan)처럼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좌파와 우파, 독선적이고 위선적인 진보와 무능하고 부패한 보수를 넘나드는 엄석대는 두 편으로 갈라진 듯 보이지만 공고한 연대로 공생하는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높은 곳에 우뚝 서 자신의 손아귀로 모든 걸 장악하려 하고 있다. 그 흉악한 실체가 언제쯤 베일을 벗게 될까? 언제쯤, 엄석대가 그랬던 것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까?

양 극단으로 분열돼 우리 편만의 우상과 영웅을 숭상하며, 그것이 일그러진 줄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세태가 씁쓸하다. 상대 진영에겐 저주를 퍼부으며 그들을 타도와 청산의 대상으로 삼아 몰아치는 세태가 구원(舊怨)의 골만 더욱 깊게 파고 있다.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에게 묻고 싶다. ‘석대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뒤숭숭한 혼란으로 점철된 세밑, 독자 제위의 평안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