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부자 사유담(史遊談)] 로이 더글러스 엘리엇
김기옥 사유담협동조합 이사
[금강일보] 캐나다 미시소거 현대자동차 딜러로 일하던 신상묵 씨는 어느 날 찾아 온 노 신사에게 자동차를 판매하는 데 성공합니다. 구매 사인을 마친 엘리엇 씨는 한국인이냐며 반가워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60년 전 우리 큰형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가셨어요. 서울 어딘가에 묻혀있다는데 우리 가족은 어쩌다 보니 한번을 못 가봤어요. 한국 사람을 만나니까 형 소식이 들리는 것처럼 반갑네요.”
미안함으로 가슴이 먹먹해진 신상묵 씨는 고객이 알려준 ‘로이 더글러스 엘리엇’이라는 이름 하나만을 들고 전사자 명단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IT강국 대한민국에서 서울이 아닌 부산 유엔군묘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상묵 씨는 직접 부산에 모시고 갈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하면 형의 무덤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유엔묘지 서비스에서 전하는 로이 더글러스 엘리엇의 묘비 화소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곧 묘비 사진을 다운로드 받아 고화질로 출력하고 액자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동생 엘리엇 씨가 차를 인수하러 오던 날 옆자리에 액자를 앉혀드립니다.
겨우 종이 한 장을 액자에 담았지만 노신사에게 전해진 것은 돌아가신 형이 돌아온 것과 다름없는 순간이었습니다. 한없이 울던 노신사는 너무나 행복하게 돌아갔고 그 이야기는 신상묵 씨의 SNS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은 그때 시작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엘리엣 씨 가족을 초청했고 20살에 떠난 형을 60년이 지나서야 부산에서 만나게 됩니다. 휴전을 겨우 3개월 남기고 캐나다 제2보병대대는 1951년 4월 서울~춘천 주 보급로였던 가평에서 끝까지 버텨 승리로 이끌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20살의 청년은 그날 하늘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캐나다군을 포함,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참전 21개국에서 4만 896명의 유엔군 희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해 생사여부도 모르는 행방불명자가 수백에 달합니다. 그때도 지금도 참 아팠던 한국전쟁이었습니다. 피부색 관계없이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귀한 선택을 하신 호국영령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