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의 사색 속으로] 경쟁이라는 이름의 두 모습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2021-07-18     금강일보

[금강일보] 찜통더위와 짜증스러운 뉴스의 일상을 지나 이번 주부터는 쓸쓸하지만 신나는 경쟁을 보게 될 작은 기대가 있다.

도쿄올림픽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무관중으로 실시된다니 경기장을 삼킬 듯한 함성이나, 경기장 밖에서 벌이는 별의별 에피소드나 이벤트를 보는 쏠쏠한 흥분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외식도 모임도 거리두기로 하기 어려운 ‘방콕’ 신세들에게 그간 재미도 없던 TV 프로그램에 모처럼 눈길을 돌리며 선수들의 경기에 몰두해 보는 새로운 기대도 생긴다.

남의 처절한 경쟁을 보는 것은 흥미롭다. 자극적이다. 신난다.

붕어를 수족관에 넣어 이동할 때, 메기를 넣어두면 붕어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아진다는 것은 붕어들이 위협을 느껴 더욱 더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치기 때문이라는 것 아닌가. 경쟁이 삶의 활력소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모든 경쟁이 그런 활력소이기만 할까?

로마 검투사들이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살인의 경쟁을 보면서 흥분하고 통쾌해하는 관중들의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검투사들의 처절한 죽음의 싸움 속에서 관중들은 삶의 용솟음치는 희열을 느꼈을까? 테네시 윌리암의 유명한 소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욕망의 반대말은 죽음’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욕망을 잃었다면, 죽은 목숨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경쟁이라는 선로를 달리는 것 같다. 선로 없이 전차는 달릴 수 없듯이 경쟁없이 욕망이 채워지는 경우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참 고단하다. 욕망은 채우고 싶고 경쟁은 하기 싫고…. 경쟁을 없애자고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은 무조건 지지하고 싶지만, 그것은 고결하기만 할 뿐 공허하다. 경쟁의 대안으로 협동을 말하지만, 협동도 협동하는 집단 간의 경쟁은 없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경쟁없이 누군가의 결정에 따르기만 하는 삶이라면 경쟁보다 더 싫다.

고단하기만 경쟁에는 얼굴이 다른 두 모습이 있다. 일테면 정(正)의 경쟁과 부(否)의 경쟁이다. 정(正)의 경쟁이 자신을 세워서 이기는 것이라면, 부(否)의 경쟁은 남을 깎아내려 이기는 것이다. 남의 경쟁을 보며 활력소가 되는 것은 정(正)의 경쟁이다. 인내하며 성취하는 그들의 노력을 보면 감동이 느껴지고, 삶의 긍정적인 자극마저 받는다. 4년마다 올림픽을 기다리면서 그들의 역전 경기를 보고 싶은 것은 나태한 나를 일깨우는 그들의 인간승리에 무임승차해 대리만족하고 싶은 나의 욕망일지 모른다. 그들은 경쟁의 천사다.

남을 깎아내려 자신을 높이는 부(否)의 경쟁을 보면 기분은 다르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장미꽃도 백합꽃이 아니요, 징그러운 개구리, 뱀, 바퀴벌레 같은 것이다. 보고있는 스스로도 구정물을 뒤집어 쓰고 있는 혐오감이 느껴진다.

네거티브로 일관되는 부(否)의 선거 경쟁을 보면 경쟁 자체에 회의가 느껴진다. 차라리 누군가 결정해서 임명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지만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선로를 달리는 전차가 토해내는 쓰레기가 있다면 네거티브(否) 선거운동이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상처내고 입힌 상처를 헤집으며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막장의 경쟁은 경쟁의 악마다.

이번 주부터 시작되는 도쿄올림픽 선수들은 경쟁의 선로를 달리면서 자신의 연마를 통해 상대를 이기는 페어플레이(정의 경쟁)로 우리에게 감동을 전해줄 것을 기대한다.

동시에 이번 주에도 치열해질 서울의 또 다른 경쟁의 선로를 달리는 한국의 대선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국민에게 또 어떤 기분을 기대하게 할 것인가. 선수든 선거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경쟁의 선로를 달리고 있음은 같을 것이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