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2] 86. 사가현 히젠 나고야성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어느 나라든 같은 지명이 있기 마련이지만, 일본에는 ‘나고야’라는 이름의 성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혼슈(本州) 아이치현(愛知県) 나고야시의 나고야성(名古屋城)이고, 다른 하나는 규슈(九州) 사가현의 나가쓰시에 있는 나고야성이다. 아이치현에 있는 나고야성은 16세기에 나고야성(那古野城)을 개명한 것이고, 사가현의 나고야성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쌓은 성으로서 당시 지명인 히젠(肥前)을 덧붙여서 히젠 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이라고 하여 구분한다.
규슈에서 한반도 쪽 해안인 마쓰라군(松浦郡)에 있는 나고야성은 원래 마쓰라토(松浦党) 가문의 친척인 나고야 씨의 성이었으나,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대외로 돌리려고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이곳에 성을 쌓도록 했다.
1591년 10월 구마모토의 번주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와 심복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에게 성을 쌓도록 명령하자, 가토와 데라자와는 규슈의 여러 다이묘에게 인부를 강제동원하고 공사를 서둘렀다. 불과 8개월 만인 1592년 3월 완성된 성은 50만 평이나 되는 넓은 성터에 둘레가 5㎞나 되는 성곽과 천수각(天守閣) 등을 쌓았다. 오층 칠계단(五重七階)으로 쌓은 나고야성의 규모는 당시 도요토미 막부가 있는 오사카성 다음 가는 큰 규모였다고 한다.
나고야성이 완성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도요토미는 오사카성에서 한걸음에 달려와 4월 1일, 왜군 15만 8000명을 9군으로 나눠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를 선봉장으로 삼아 조선 정벌을 명령했다.
이들 세 장수는 모두 규슈의 번주들이었는데, 도요토미는 조선 정벌에 반대하는 천주교도이자 온건파인 고니시와 불교도이자 강경파인 가토에게 선봉장을 맡겨 경쟁심으로 조선 정벌을 신속하게 끝내도록 했다. 그리고 가토와 함께 나고야성을 쌓았던 심복 데라자와 히로다카를 초대 가라쓰 번(唐津藩)으로 임명하여 출병한 왜군의 병력수송과 병참지원의 임무를 맡겼다. 도요토미는 이곳에서 1년 2개월 동안 머물면서 전쟁 상황을 보고받고 지휘하다가 1598년 8월, 병사하면서 7년 전쟁은 끝났다.
후쿠오카에서 도시고속도로를 타고 자동차로 가라쓰(唐津)까지 약 1시간, 그리고 가라쓰 시내에서 국도 204호를 따라 약 30분가량 해안도로를 달리면 나고야성과 나고야성 박물관이 있다. 후쿠오카에서 열차 JR를 타고 가라쓰역에 도착했다면 가라쓰에서 나고야성행 시내버스를 타고 나고야성 박물관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나고야성은 1926년 일본 국가 지정 사적이 되고, 2006년에는 '일본 100대 성(城)'에 선정되기도 했다. 박물관의 입장료와 주차비는 무료이고, 나고야 성터 관람료만 100엔이다. 나고야성 입구에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은 1993년에 건립했는데, 박물관 앞에는 제주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돌하르방이 어색하다. 박물관 입구에는 ‘사가현 일한(日韓)교류센터’ 간판이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면, 임진왜란의 침략사가 아닌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교류사'를 주제로 박물관을 건립했다고 소개했다. 박물관은 일본의 원시와 고대 이후 계속된 ‘한일교류와 중세 일본의 대외교류 및 임진왜란 그리고 근현대의 일본 열도와 한반도’ 등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조선 침략에 대한 진솔한 사과가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네를 합리화하는 속셈이 들여다보인다.
일본의 이런 자세는 2차대전을 일으키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난 뒤에야 무조건 항복하면서 원폭 투하지인 나가사키에 피해자임을 강조하고, 세계평화 공원을 조성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행태다.
박물관에는 통일신라 작품으로서 우리 국보 제83호인 미륵반가사유상 복제품과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모형이 큼지막하게 만들어져 있다. 고려시대 불화로서 일본 다이도쿠사(大德寺)에서 소장하고 있는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 복제품도 큼지막하게 걸려있고, 조선통신사 행렬도와 부산 초량의 왜관도, 동래부순절도도 전시되어 있다.
최근에는 도요토미의 대형 초상과 함께 이순신 장군 영정과 전라좌수영 대첩비와 명나라 신종이 이순신 장군에게 내린 8가지의 하사품(보물 440호)의 복제품인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도 전시하고 있는데, 도요토미는 왕조실록의 기록대로 마치 원숭이 모습과 비슷하다. 명조팔사품 원본은 이순신 장군을 모신 통영의 충절사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렇듯 일본의 침략을 감추고 그들의 선전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박물관을 나와서 100m 남짓 잡초가 우거진 산길을 올라가면, 히젠 나고야 성터 입구다. 입구에서는 성터 유지관리를 위한 명목으로 100엔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일본 막부(幕府)시대의 성은 대체로 3구역으로 나누고, 이것을 미루(丸)라고 했다. 마루는 가장 중심인 혼마루(本丸: 주성)와 니노마루(二の丸), 산노마루(三の丸) 등이 혼마루를 둘러싸는 형식인데, 니노마루 어전(御殿)에는 다이묘가 살고, 산노마루에는 가신들이 살았다. 성의 중심에 해당하는 천수각은 크기에 따라서 소천수, 부천수, 중천수 등으로 나누는데, 목조 계단을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서 1층에서 한 층씩 올라가면 지휘소 겸 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나고야성의 천수각에서 내려다보이는 반경 3㎞ 내외의 50만 평의 너른 벌판에는 조선을 침략한 영주들의 왜군부대 120개가 각각 진영을 설치하고 주둔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죽은 뒤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조선과 화해를 원한다는 제스처로 나고야성을 허물도록 했다. 가라쓰 번주 데라자와 히로타카는 1602년 나고야성의 석재를 뜯어다가 자기의 아성인 가라쓰 성(唐津城)을 축성했다. 사실 ‘일본 100성’ 중 하나라고 하는 나고야성은 성문 하나, 건물 한 채 남아있지 않고, 무너져내린 성벽의 잔재와 천수각이 있었던 위치에 세운 표지석이 전부다.
해발 90m라고 하는 천수각 표지석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대마도와 대한해협의 물결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하지만, 이처럼 조선을 침략하여 명을 멸망하고 청이 일어나고, 도요토미 시대가 사라지고 도쿠가와 막부가 출범하는 등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던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의 아성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없었던 조선의 위정자들의 어리석음이 새삼 역겹게 느껴졌다. 정치지도자의 넓은 안목은 예나 제나 필요한 요체이지만.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