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2] 90. 우레시노 온천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금강일보] 규슈 서북쪽인 후쿠오카시와 나가사키현 사이에 있는 사가현(佐賀縣)은 교통의 중심지다.
사가현에서 서쪽에 있는 우레시노시(嬉野市)는 2006년 1월부터 후지쓰 군(藤津郡)의 시오타정(鹽田町)과 우레시노정(嬉野町)을 합쳐서 사가현의 9번째 시(市)가 된 인구 약 2만 8000명(2018년)의 작은 도시다.
예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우레시노란 지명은 진구 황후(神功皇后: 200~ 270)가 전쟁에서 부상한 병사들이 이곳에서 목욕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지는 것을 보고, “아~ 우레시나아(嬉しいなあ: 기쁘구나)” 하고 감탄했다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우레시노는 혼슈 남서쪽에 있는 시마네현(島根県)의 히노카미 온천, 간토 지방에 있는 도치기현(栃木県)의 기츠레가와 온천과 함께 ‘일본 3대 미인온천(美人溫泉)’으로도 유명한데, 미인온천이란 탄산나트륨이 많은 온천수가 피부를 매끄럽게 하고 탄력 있게 해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후쿠오카에서 우레시노까지는 급행버스로 약 2시간이 걸리고, 나가사키에서는 급행버스로 약 1시간 10분이 걸린다. 우리는 후쿠오카에서 렌터카를 타고 다자이후로 가서 규슈국립박물관과 다자이후 텐만구 신사를 둘러본 뒤, 사가현의 아리타 마을(有田町)과 포세린 파크(Porcelain Park)를 거쳐서 우레시노에 도착했다.(아리타 마을에 관하여는 [아리타 마을 도잔신사] 편 참조)
아리타 마을에서 우레시노까지는 40㎞쯤 떨어졌는데, 낯선 시골길이어서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에 우레시노 시볼트 온천(ジ-ボルトの湯)을 입력한 뒤 조심스럽게 달렸다.
후쿠오카와 나가사키 중간쯤인 우레시노시는 시내를 흐르는 우레시노 강을 따라 60여 곳의 온천 호텔과 료칸(旅館)이 밀집해 있는데, 우레시노는 온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5년에 걸쳐 최우수 녹차로 선정될 만큼 유명한 녹차밭에 둘러싸여 있어서 온천에서 녹차 향이 묻어난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마을이다.
우레시노는 국내의 많은 여행사가 규슈 온천여행에서 필수코스로 정하는 곳이기도 한데, 시내 중심인 우레시노 네거리에는 온천을 찾은 고객을 위한 공동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은 90분 동안은 무료이고, 초과 시간마다 얼마씩 주차비를 내는 시스템이었다. 극히 사소한 일이지만, 가는 곳마다 주차장을 찾아야 하고 또, 주차비가 부담되다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 일본에서는 뜨거워서 마실 수 없는 온천수를 ‘악마의 저주’라고 불렀는데, 온천수가 질병이나 다친 사람에게 효험이 있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료칸과 함께 온천이 발달하게 되었다.
히 우레시노 주민들은 개항 당시 유일한 서양 교역국이던 네덜란드 상관(商館)의 독일인 의사 시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1866)가 이곳을 다녀간 뒤, 1832년 귀국 후에 펴낸 책 ‘일본(Nippon)’에서 우레시노 온천을 크게 찬양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시볼트가 개척했다고 하는 시볼트 온천이 네거리에서 가까운 우레시노바시((嬉野橋) 옆에 있다. 마을 공동주차장이 있는 네거리에서 50m쯤 떨어진 ‘시볼트 온천’은 시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고딕식으로 지은 대중탕인데, 1922년 처음 지을 때는 목조 건물에 시볼트의 이름을 따서 '시볼트 온천'이라고 했다고 한다.
온천을 관광상품으로 만들게 한 시볼트는 독일 남부인 뷔르츠부르크 출신으로서 뷔르츠부르크 의과대학 교수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도 1820년 뷔르츠부르크 의대를 졸업한 뒤 병원을 개업했다.
그런데 베를린대학교 의대 교수로 있던 숙부의 소개로 네덜란드의 군의관이 되어 동인도회사가 있는 바타비아(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갔다. 평소 여행과 탐험을 즐기던 시볼트는 기뻐하며 자카르타로 갔는데, 몇 년 후 일본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商館) 의사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쇄국령으로 네덜란드하고만 교역했고, 외국인들은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로 거주지를 제한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볼트는 데지마에서 상관원들 치료 이외에 일본인들에 대한 진료와 식물학에도 열심이었다.
1824년 나가사키 교외에 나루타기 주크(鳴滝塾)이라는 학원을 설립하여 의술을 가르쳤는데, 나루타기 주크는 일본 전역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의학과 자연과학 등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전달하는 창구가 되었다.
유학생 중 한 사람인 이토 겐보큐(伊東玄朴: 1801~1871)는 훗날 일본 궁중의관 중 최고직인 법의(法醫)가 되었고, 또 그가 세운 서양의학소(西洋醫學所)는 동경의대의 전신이 되었다.
시볼트는 1826년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장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알현하러 에도를 방문할 때도 동행하여 일본인 의사들에게 복강내에 비정상적으로 고여있는 복수를 빼내는 기술인 복수천자(腹水穿刺: Paracentesis), 종양 절제술, 겸자(鉗子)를 이용한 분만술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 서양의학 기술을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1829년 네덜란드 정부의 귀국 명령을 받고 귀국하는 가방 속에 일본과 조선지도가 발견되자, 일본에서는 정탐하러 온 첩자로 오인하여 가뒀다가 1년 후에 추방되었다. 그러나 1832년 그가 귀국하여 네덜란드에서 펴낸 저서 ‘일본(Nippon)’은 유럽인들에게 일본을 소개하는 지침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페리 제독이 개항을 목적으로 일본을 침략하는 지침서가 되기도 했을 만큼 유명해졌다.
일본은 시볼트의 저서를 계기로 추방 후 28년 만인 1859년 추방령을 해제하자, 다시 일본에 온 그를 도쿠가와 막부의 외교 고문으로 임명했다. 시볼트는 일본에서 추방되기 전에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두 살 난 딸을 두고 떠났다가 성년이 된 딸과 재회했는데, 그 딸은 추방되기 전에 가르쳤던 제자들로부터 의학을 배워서 일본 최초로 여성 의사가 된 쿠스모토 이네(楠本イネ: 1827~1903)다. 시볼트는 3년 후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간 뒤, 1866년 70세의 나이로 독일에서 죽었다.
시볼트 온천의 대중탕 목욕 요금은 성인 420엔, 70세 이상은 320엔이었다. 여행객으로서 현지 주민들과 함께 대중탕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점도 좋았지만, 온천수의 뜨겁고 부드러운 느낌은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의 온천탕 중 최고라고 생각된다.
마을 공동주차장이 있는 네거리에서 왼쪽 골목에는 무료 노천 족탕도 있다. 유성의 국군휴양소인 계룡스파텔 옆에도 무료 노천탕이 있지만, 그 차원이 다르다. 또, 우레시노에서 가장 유명한 와타야벳소(和多屋別莊)는 5만 평이나 되는 넓은 부지에 현대식 건물인 타워관과 일본 전통 양식의 별관이 있는데, 넓은 정원은 산책하기 좋게 꾸몄다.
또, 본관 로비의 카페는 족탕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음료수나 술을 마시며 족욕을 즐길 수도 있고, 숙박객이 아니더라도 식당에서 1500엔 이상의 식사를 하면 온천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한편, 와라쿠엔(和楽園)은 일본 최초로 온천에 녹차를 결합하여 ‘미용 온천’을 시작한 료칸인데, 본관 40실, 별관 11실, 별채 5실 등 료간이 50개가 넘는다. 와라쿠엔은 별관과 별채에 노천탕이 있고, 투숙객만 이용할 수 있는 전세 노천탕(가족탕)도 있다. 시볼트 온천의 오른쪽 우레시노바시(嬉野橋)는 H-빔으로 만든 다리인데, 다리 아래로 흘러가는 온천수들과 어울린 주변 풍경도 아주 일품이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