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칼럼 - 길을 걷다] 아름다운 파락호
연극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애국지사 김용환 선생
[금강일보] 파락호(破落戶). 글자 그대로 깨어지고 몰락한 인물을 의미하는데 보다 정확한 뜻으로 행세하는 가문의 자손으로 허랑방탕하게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집안 재산과 위신을 탕진한 사람을 일컫는다.
대표적인 파락호로 우선 흥선 대원군을 꼽는다. 치밀한 의도 아래 짐짓 파락호 행세를 하는 동안 안동 김씨 세력의 견제를 피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철종 승하 후 아들 고종을 옹립하고 세력을 떨쳤다.
그리고 또 한 분, 안동 지역 명문가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13대 종손 김용환 선생을 떠올린다.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하여 짐짓 천하에 둘도 없는 낭인 행세를 하면서 어마어마한 자금을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냈다. 청년 시절 항일운동에 참여하여 모진 고초를 겪다가 전략을 바꾸어 파락호로 밑바닥 삶을 자초하였다. 집요한 사찰의 눈길을 벗어나려는 고도의 책략이었던 것이다.
가산을 모조리 탕진하여 딸 시집 보낼 여력이 없자 사돈댁에서 장롱 대금을 보내왔는데 그마저 노름돈으로 들고 나가 새색시는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시댁으로 갔다고 한다. 이런 신산한 선생의 삶은 1995년 건국훈장을 추서할 즈음 선생의 딸 김후웅 여사의 노랫조 서간문에 절절히 담겨있다.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대려고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오랜 세월 응어리져 굳어진 아버지에 대한 야속한 원망과 미움이 대승적인 화해로 마무리된다.
지난 주 막을 내린 극단 대학로 극장의 연극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이우천 작, 연출)는 바로 이분 김용환 선생의 항일애국 활동을 따님의 시선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시간적, 물리적 거리를 좁히는 속도감이 실린 전개, 등장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호소력 있는 메시지로 이끌어갔다.
연출의 기량과 주인공 김후웅 여사역 김용선 배우를 비롯한 출연진의 호연이 쉽지 않은 스토리텔링을 박진감 있게 펼쳐냈다. 계속 공들여 다듬어 가면서 애국선열의 충정을 조명하는 흥미와 교훈의 문화콘텐츠로 자리매김하기 바란다.
가진 자, 힘 있는 자 그리고 마땅히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이런저런 지탄을 받는 이즈음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아름다운 파락호의 결연한 의지와 희생의 기록은 감동으로 기억된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한국생활연극협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