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 이야기] 문장과 역사에 능통했던 입암 민제인
금강유역 토성(土姓) · 입향성씨(入鄕姓氏) - (8)여흥민씨(驪興閔氏)(4)
동복현감을 지낸 민귀손(구손)의 아들이고 회덕 입향조인 민충원의 증손이다. 1520년(중종15) 문과에 급제해 호당(湖堂,독서당)에 들어가 독서했고, 이듬해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척간유생도기’를 가필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이후 김안로가 물러나자 1525년 춘추관 기사관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13년 이조정랑에 올랐다.
이어 성균관 사성으로 승진했는데 이 때 문신 제술시에서 장원했다. 이어 호조참의, 홍문관 부제학, 시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1538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됐는데, 이때 구언전지를 지어 올렸다. 1541년 외직으로 나가 평안도 관찰사가 됐고, 이어서 사헌부 대사헌, 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544년 중종이 죽자 고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인종 때 사헌부 대사헌(종2품검찰총장)을 다시 역임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가 됐다. 그때 민제인은 당시의 권신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일파를 제거하는데 협조했다. 그리하여 보익공신 2등에 책록됐고 여원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평안도관찰사(종2품감사),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종1품)을 거쳐 1547년(명종2) 좌찬성(종1품)에 올랐다.
이 때 그는 진휼사를 겸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힘썼다.
1548년(명종3) 윤원형 일당은 을사사화를 은폐하기 위하여 당시 ‘시정기’의 집필자인 안명세를 죽이고 그 기록을 고치려 하였다. 이때 민제인은 불가함을 강력하게 역설해 간당들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됐고, 나아가서 대사간 진복창 등의 탄핵으로 녹훈이 삭제되고 마침내는 공주로 귀양가게 됐다. 민제인은 적소에서 을사사화에 참여해 많은 선비에게 화를 입힌 것을 후회하고 지내다가 죽었다.
문장과 역사에 능통하였으며, 저서로는 ‘입암집’이 있다. 부여 부소산의 고란사 옆 건물 내부에는 그가 지은 ‘백마강부’가 걸려 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그의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의 묘소는 처음에 대전 대덕구 삼정동에 있었으나 후에 경기도 양주시 명우리에 이장되었다 한다.
효자 민광민(閔光旻, 1662년~1701년, 호는 기상옹(冀常翁), 묘소는 대덕구 삼정동)은 조선후기의 효자로 광해군 14년 민평의 아들로 대전 유성구 도룡동에서 출생했다. 민광민은 선대의 아름다운 유풍을 잘 계승해 효성이 지극했으므로 이른 바 ‘민씨 삼세칠효’의 한 사람으로 칭해진다.
민씨 삼세칠효란 여흥민씨 중에서 민여검의 아들대로 부터 3세에 걸쳐 직계 6인이 세상에 돋보이는 효행을 해 그 정신이 후인의 모범이 됐기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의 칠효자는 민여검의 아들 민평·민환의 형제와 민평의 아들 민광신·광민 형제, 그리고 민환의 아들 민광경과 민광신의 아들 민경중, 민광민의 아들 민원중 등을 칭하는데 이들은 세상의 명예와 부귀를 탐하지 아니하고 가난한 중에서도 대를 이어 돈독한 효행과 유자의 덕을 수행하여 당시의 후세의 귀감이 된 인물들이다.
민광민은 효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관이 되었고, 주부를 거쳐 양구현감을 지냈다. 1701년(숙종27)에 죽었는데, 묘는 대덕구 삼정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