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의 창] 혁신의 두 얼굴, 성공과 실패
이수형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정권이 새로 수립될 때마다 혁신을 외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구호에 그치고 오히려 혁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곤경에 빠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럼 그 많은 혁신은 왜 성공하지 못한 것일까? 여러 사유가 있겠지만 혁신의 아이디어가 덜 구체적이고 불편을 무릅쓰고 참여할 만한 가치를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혁신을 위해서는 바른 미래관과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
올해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19 사태의 여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급증하는 미중 갈등 등 대내외 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AI의 발전과 방대한 정보의 이동성이 급격히 증가한 이 시대의 도전을 기존의 획일화 된 틀에서 대응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시대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는 조직들은 결국 코닥, 노키아, 소니처럼 역사의 뒷물결에 밀려날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요즘 여느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가장 남용되는 유행어 중 하나가 ‘혁신’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혁신은 실패하고 혁신하지 않는 기업은 사라진다고 한다 (헨리 체스브로 교수, MIT). 그렇다면 우리 연구자들은 어떻게 혁신에 접근해야 할까? 뻔한 말이지만 혁신은 그 주체가 주도해야 성공한다.‘당하는 혁신’은 재앙일 수밖에 없는 예를 수없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혁신을 도외시 할 수 있을까? 혁신을 도외시하는 수구적 태도는 결국 사회적 강제력에 의해 ‘당하는 혁신’이 되고, 재앙의 씨가 된다.
혁신은 언제나 과거와의 단절 및 부정을 떠올리게 한다. 새 경영진은 조직을 개편하고 기존의 프로젝트를 청산하는 것에 큰 비중을 둔다. 그리고 무분별한 벤치마킹으로 흉내 내기를 통해 몸에 잘 맞지 않은 외형을 만드는 경우들이 다반사다. 그러나 이는 그 조직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조직원의 혁신 피로감을 초래해 쇠뿔을 고치다 소를 죽이기에 십상이다. 이런 방식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는 실패의 관행으로 그 자체가 혁신의 대상이다. 성공하는 혁신을 위해서는 먼저 구체적이고 명백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조직원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 조직원 스스로 혁신을 이끌 수 있는 확실한 주체 세력이 돼야 지속성 있는 혁신이 가능한 것이다.
인류의 조상 호모사피엔스는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기후변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새로운 터전을 찾아 아프리카를 탈출했다.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에 도전한다는 아주 위험한 혁신적 선택을 스스로 한 조상의 결정이 문명을 일궈 인류의 성공을 이끌었고 익숙한 환경에 남아 삶을 도모 하던 이들은 오늘날 현대문명에서 소외된 아프리카인이 됐다. 인류가 최초 아프리카 대륙을 떠났을 때처럼 혁신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두렵고 긴 여정이다. 하루의 차박을 준비할 때도 그 목적지와 주체가 확실한데 그 목표가 불확실하거나 고난을 함께 이겨나갈 공감이 없는‘혁신을 위한 혁신’은 공염불일 뿐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