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2] 120. 나라 호류지(法隆寺)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2022-06-28     금강일보
▲ 호류지 표지석

일본 고대도시 나라에는 유명한 도다이지(東大寺), 고후쿠지(興福寺)를 비롯하여 도쿄·교토 박물관과 함께 일본 3대 국립박물관인 나라 박물관이 있다.

나라 지방에는 4세기경 호족 연합정권인 야마토 정권(大和朝廷)이 있었는데, 중국 한서(漢書)에서는 야마토 정권을 왜(倭)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는 6세기 초부터 8세기 초까지 ‘날아가는 새처럼 급격하게 발전’한 아스카 문화(飛鳥文化)의 중심지로서 794년 수도를 현재의 교토로 옮길 때까지 고대 일본 정치의 중심이자 대륙으로부터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였다. 절정기의 아스카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나라 최대의 사찰은 호류지(法隆寺)인데, 호류지를 이카루가 데라(斑鳩寺)라고도 한다.

이것은 이 지역에 ‘찌르레기 새’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카루가 이카시오미코토(伊香留我 伊香志男命)라는 신을 지역의 신으로 모셨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호류지 가는 길

호류지는 금당의 동쪽 법당에 안치된 약사 여래상의 후광명(後光銘)과 호류지유래문(747)에서 607년 스이코 천황(推古天皇)과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아버지 요메이 천황의 유언을 받아 건립했다고 하는데, 쇼토쿠 태자 즉, 우마야토노키미(厩戸王)가 외척 소가씨와 갈등으로 605년 아내 선비(膳妃)의 고향에 와서 이카루가에 궁(斑鳩宮)을 짓고, 그 부근에 절을 세운 것을 효시로 보고 있다.

또, 일본서기에는 670년 4월 30일 호류지가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했는데, 소실된 후 언제 재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호류지에는 일본의 국보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도 190종 3000여 점이나 된다.

특히 금당에는 고구려 화가 담징이 그린 벽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한국의 석굴암, 중국 원강 석불과 함께 동양 3대 미술품으로 손꼽힐 정도였으나, 1949년에 소실되어서 현재는 모사품만 남아있다.

호류지는 간사이 지방의 최대도시 오사카에서 JR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JR 나라역에서 다시 기차로 30분 정도 가서 긴테쓰(近鐵) 츠츠이역(筒井驛)에서 내린 뒤, 72번 마을버스를 타고 약 10분 정도 가는 버스 종점이 호류지 입구이다.

호류지 가는 옛길

나라 현청 길 건너편에 있는 나라 국립박물관 앞에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시 38분에 출발하는 88번, 89번 시내버스를 타면 기차를 타고 갈 때 마을버스로 갈아타는 불편은 겪지 않아도 되지만, 시내버스는 1시간가량 걸린다.

요금은 760엔이다. 이처럼 나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호류지는 불편하다고 패키지여행에서 탐방을 제외하기도 한다.

시내버스 종점에서 호류지 정문까지 약 100m가량의 길 양쪽에는 오래된 소나무 숲은 콘크리트 석주로 차단막을 해두었다.

그 안의 폭 2m가량의 좁은 숲길이 옛날 호류지로 통하는 길이고, 주변의 소나무들을 훼손하지 않고 옛길을 보존하려고 옆에 넓은 찻길을 새로 낸 것 같다.

그런데, 호류지 입구는 우리네 유명 사찰 주변마다 음식점, 기념품 판매소들이 난립하고 있는 것과 달리 매우 조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소나무 숲길이 끝나는 부분에 무로마치 막부(室町)시대에 세웠다고 하는 남대문이 우리네 전통 사찰의 일주문이다. 현재의 건물은 1438년 재건된 것인데, 이곳에서 입장권을 산다. 사찰 관람료로는 약간 비싼 1500엔이다.

금당과 오중탑

일본불교 성덕종의 총본산인 호류지는 금당․ 오중탑(五重塔)이 있는 서원(西院)과 중궁사(中宮寺)․몽전(夢殿) 등이 있는 동원(東院)으로 나뉘는데, 쇼토쿠 태자의 사후인 623년 그의 아들이 부친의 극락왕생을 위해 석가삼존상을 봉안한 것이 서원이고, 그 후 739년경 교신(行信) 스님이 쇼토쿠 태자가 살던 이카루가 궁터에 몽전을 지어 확장한 것이 동원이다. 헤이안시대에 동․서원이 통합되어 5만 6500평이나 되는 대사찰이 되었다.

남대문에서 직접 중문(重門)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왼쪽으로 난 작은 문으로 입장한다. 중문에서 네모진 회랑이 서원의 오중탑과 금당을 에워싼 모양인데, 아스카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인 중문에는 8세기 나라 시대에 만든 목조 금강 역사상이 양쪽에 있다. 금강역사들은 우리네 사찰의 금강문을 지키는 금강 역사상보다 유순해 보인다.

후원에서 본 금당과 오중탑

중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목조 오중탑이 있고, 오중탑 왼쪽에 금당이 나란히 있다.

목조 오중탑은 아파트 11층 높이인 31.5m나 되는데, 어쩌면 몽골의 침략 때 소실된 경주 황룡사 구층탑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앞의 커다란 소나무에 가려서 탑과 금당을 깔끔하게 사진에 담을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호류지 오중탑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빼닮았는지 알게 된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화를 바탕으로 나라 시대에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는데도, 일본은 한반도 전래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목조 2층 건물인 금당은 외진(外陳)과 내진(內陣)으로 나뉜다. 먼저, 남향인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4칸에 1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는데, 금당 남쪽에 문이 3개, 동쪽·서쪽·북쪽에 각각 1개씩 있어서 벽면은 모두 12개소가 된다.

외진의 각 벽마다 석가 정토(동벽)·아미타 정토(서벽)·약사 정토(북벽의 동쪽)·미륵 정토(북벽의 서쪽)와 여러 보살도가 그려져 있다. 벽화는 같은 시대의 양식이지만, 각각 다른 작가들이 나눠서 그려서인지 수법에 큰 차이가 있다.

목조 오중탑

금당 내부에서 10개의 두리기둥이 둘러싸고 있는 수미단(須彌壇)을 내진이라고 하는데, 10개의 두리기둥은 다시 사각기둥이 각각 2등분 되어 있어서 모두 20개의 작은 벽을 이루고 있다. 이곳 각 벽면마다 비천도(飛天圖)가 그려져 있었다.

또, 금당에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이 부친을 위하여 봉안한 석가삼존상을 본존으로 하여 쇼토쿠 태자의 아버지 요메이 천황을 위하여 만든 금동약사여래좌상, 쇼토쿠 태자를 위해 만든 금동석가삼존상, 쇼토쿠 태자의 어머니를 위하여 만든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사천왕상 등의 불상이 있다.

그러나 1949년 1월 금당 수리 중 화재로 비천상 벽화를 제외하고 벽화들이 모두 소실되어 현재 금당의 벽화는 화재 전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금당과 오중탑의 오른쪽에 남북으로 배치된 동실과 서실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승방인데, 그 중 동실이 쇼토쿠 태자의 존상을 안치하고 성령원(聖靈院)이다.

백제관음

성령원 오른쪽에 법륭사의 보물을 전시하고 있는 현대식 박물관인 대보장전(大宝蔵院)이 있다. 우리네 사찰의 성보박물관쯤 되는 1998년 건축한 대보장전의 백제관음당에는 3m에 이르는 거대한 백제관음상이 있다.

백제의 장인이 일본에 건너와서 제작한 일본 불교미술의 대표작으로서 8등신의 날씬한 몸매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비가 넘치는 표정이다.

백제관음당 뒤편에 새로 지은 넓은 전각에는 관음보살상과 2563마리 비단벌레의 날개로 만든 다마무시즈시(玉蟲廚子: 옥충주자) 등을 전시하고 있지만, 내부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서원을 나와서 황토로 만든 담장길을 따라가면 동원인데, 동원은 별도로 입장료를 받는다. 동원의 중궁사(中宮寺)는 아스카시대에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7개 사찰 중 유일한 비구니 사찰로서 원래는 현재의 위치보다 동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헤이안 시대에 통합되었다고 한다.

1968년에 복원된 중궁사의 대웅전은 연못과 불당을 조화시킨 것이 베트남 하노이의 사찰 일주사(一株寺)를 연상시킨다.

몽전

그러나 동원에서의 중심은 중궁사 대웅전이 아니라 팔각형으로 지은 몽전이다.

몽전은 쇼토쿠 태자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서 불경의 어려운 부분을 가르쳐주었다는 전설과 함께 739년경 교신 스님이 쇼토쿠 태자가 살던 이카루가 궁터에 지은 것인데, 내부는 볼 수 없게 막아두었다.

중궁사
범종각

그 왼편에 부채꼴 모양의 범종각에는 중궁사(中宮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범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