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운의 우문우답] 형식과 강요의 음주문화
논설위원
인간이 생활 속에 만들어 내는 것을 문화라고 한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짓 중에서 문화가 아닌 것이 없다. 문화란 말은 인간의 행위를 일컫는 어느 말 뒤에 붙여도 자연스럽다. 밥을 먹는 것은 식문화이고, 집에서 사는 것은 주거문화이고, 옷을 입는 것은 의류문화이다. 노는 것은 놀이문화고, 일하는 것은 노동문화다. 술을 마시는 것도 당연히 문화여서 이를 음주문화라고 말한다.
음주문화는 유행을 탄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2차, 3차 몰려다니며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런 문화는 시나브로 사라졌다. 술을 마시고 나면 으레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그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과거와 비교하면 마시는 양도 줄었고, 분위기도 많이 차분해졌다. 음주량이 주는 것은 바람직하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은 소주와 맥주다. 막걸리나 위스키, 와인, 청주 등도 마시지만 소주와 맥주가 대세다. 둘 중에서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소주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술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대개의 한국 음주문화는 소주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다 보니 소주를 중심에 세우고 뭔가를 섞어서 새로운 맛을 연출하는 일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국내에 출시된 음료 중에 소주와 궁합을 안 맞춰본 사례는 거의 없다.
한때 자양강장제나 소화제를 소주에 섞어 마시기도 했고, 탄산음료와 혼합하기도 했다. 인삼차 분말을 소주에 타 마시기도 했고, 녹차 티백을 소주에 담가 녹차 향을 우려낸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음료 말고도 오이나 비트(빨간 무) 등을 술에 담가 마시기도 했다. 술에 술을 타는 것도 수없이 변화하며 유행을 탔다. 술에 술을 섞을 때는 맥주가 중심에 섰다. 양주, 고량주, 보드카 등 독한 술을 맥주에 섞어 희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어느샌가 소주와 맥주가 만나 ‘소맥’이란 제삼의 술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러다 말겠지, 잠시 유행하겠지 싶었는데 ‘소맥문화’가 이어진 것이 벌써 20년을 훌쩍 넘겼다. 술자리가 시작되면 으레 소맥을 몇 순배 돌리는 일을 당연시한다. 묻지도 않고 누군가가 소주와 맥주를 타서 모든 참석자에게 균등하게 돌린다. 여기서부터 강요는 시작된다. 소맥이 몇 바퀴 돌아야 참석자들은 개인의 취향과 주량에 맞게 술을 마실 수 있다.
한국 음주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강요는 건배사다. 언제부터인지 술자리에 참석하면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건배사를 해야 한다. 전체 술자리의 주도권을 잡은 한 사람이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하며 건배사를 권한다. 이때 소개하는 이와 건배사 순번을 받은 이가 경쟁하듯 말을 길게 하면 술자리 분위기는 가라앉고 지루함만 가득해진다. 모두가 건배사를 한 번씩 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오랜만에 정감을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이렇게 건배사가 돌아가며 지극히 형식적인 자리로 전락한다. 그런 가운데 술자리가 끝난다.
건배사 순회는 공평하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굳이 나서기를 싫어하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에게 아주 곤혹스러운 의례가 된다. 사회 초년생에게 설문 조사를 해보니 직장생활 중 가장 스트레스를 느끼는 항목 중 하나가 ‘건배사 강요’였다는 결과를 보고 깊이 동감했다. 즐거운 음주문화를 위해 원치 않는 사람에게 건배사 강요는 고통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건배사는 건강, 행복, 우정, 사랑 등 온갖 좋은 말을 끌어들여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만들지만, 허언(虛言)이 대부분이다. 말뿐이지 실천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술자리 건배사는 허언 경연대회다. 음주문화도 변화할 때가 됐다. 당사자의 기호는 무시한 채 소주와 맥주 섞은 술을 강요하고, 건배사를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 누군가는 문화가 아니라 악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강요가 이어지는 형식적 술자리 말고 정감 있는 진솔한 술자리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