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2] 144. 고대 로마의 유적지(Foro Romano)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늑대 젖을 먹고 자라서 로마를 건설한 로물루스 형제 등 로마인들은 캄피돌리오 언덕(Monte Campidoglio)과 팔라티노 언덕(Monte Palatino)을 중심으로 한 7개의 언덕에 살면서 언덕 아래 남쪽 계곡을 모두 메워서 시민들이 모이는 광장으로 삼았다.
포로 로마노에서 12유로인 통합입장권을 사면, 콜로세움 경기장을 비롯하여 팔라티노 언덕, 포로 로마노를 모두 관람할 수 있다. 포로 로마노는 캄피돌리오 광장의 남쪽 기슭이어서 그곳에서도 매표하여 입장할 수 있다.
테라스에서 성스러운 길 왼편으로는 바실리카, 에밀리아, 원로원 건물의 돌기둥만으로도 당시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짐작하게 주는데, 세베루스 개선문 뒤쪽에 가려져 건물 일부만 보이는 것이 원로원(Curia Senate House)이다. 원로원 건물은 BC 670년에 처음 세워진 이후 서기 303년에 보수하여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원로원 앞에서 시저가 심복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했으며, 원로원 앞 광장은 코미티움(Comitium)이라 불리며 집정관을 선출하던 곳이었다. 아고라에는 원로원 의원들이 광장에 모인 군중을 향해서 자신의 주장을 소리 높여 외쳤던 연단(演壇) 격인 네모난 대리석이 무너진 원주 기둥 옆에 큼지막하게 놓여있다.
306년에 세운 가로 100m, 세로 65m, 높이 35m에 이르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Basilica di Massenzio)는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큰 공회당으로서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라고도 하는데, 천장은 도금된 타일로 장식했지만 7세기경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을 지을 때 뜯어가서 지금은 3개의 거대한 아치형 천장만 남아 있다.
또, 성스러운 길 오른쪽에는 제우스와 스파르타 틴다레오스(Tyndareus)왕의 왕비 레다(Leda)와 사이에서 태어난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 형제를 기리는 신전을 비롯하여 ‘불의 여신’ 베스타 신전(Tempio di Vesta),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사투르누스 신전(Saturnus) 등이 있다.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은 BC 496년 로마가 라틴족과 레길루스 호수 전투를 벌일 때, 이들 형제가 백마를 타고 진두지휘하며 승리를 이끌었다고 하여 그들의 신전을 세우고,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길인 코르도나타(Cordonata) 양쪽에도 그들의 백마를 이끈 조각상을 세우기도 했다. 또, BC 6세기에 지은 베스타 신전은 20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원형 건물은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으로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선발된 6명의 베스타가 로마의 평화를 위하여 성화가 꺼지지 않도록 30년 동안 임무를 맡다가 해방됐다. 만일 불을 꺼뜨리면 여사제들을 생매장했다고 한다. 사투르누스 신전은 로마인들이 가장 숭배한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서 이오니아식 건물인데, 지금은 기둥 8개만 남아 있다.
포로 로마노에서는 로마를 로마답게 만든 개선문을 많이 볼 수 있다. 개선문은 로물루스가 외적을 물리친 뒤 시민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단합을 강조하기 위하여 월계관을 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네 마리 백마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군대와 함께 행진한 이후,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은 모두 성스러운 길을 행진하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전쟁이 잦았던 로마는 영웅심과 애국심을 강조하기 위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의 개선문을 많이 세웠는데, 현재에도 로마에는 개선문이 34개나 남아 있다. 포로 로마노에만 오현제 시대 이후 혼란을 수습한 20대 황제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91~ 211) 개선문을 비롯하여 아우구스투스의 개선문, 티투스 개선문(Arco di Tito) 등 3개가 있다.
현존하는 개선문 중 가장 오래된 티투스 개선문은 티투스 황제가 예루살렘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81년에 세운 개선문으로서 파리의 개선문의 원형이 되었다. 티투스 개선문의 아치 안쪽에는 로마 병사들이 예루살렘 신전에서 약탈품을 운반하는 장면을 새긴 부조물(浮彫物)이 가득하다. 또, 세베루스 개선문은 193년부터 211년까지 18년간 통치한 세베로 황제의 통치와 그의 아들 카라칼라와 제타의 아라비아·아시리아와 전투에서 승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원로원과 시민들이 헌정한 것이다.
그런데, 굴착기나 중장비가 없던 로마 시대에 이렇게 거대한 석조건축물을 어떻게 깎고 다듬어서 높다랗게 쌓아 올렸는지 모르겠다. 포로 로마노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지상의 석조건축물뿐만 아니라 7개의 언덕에서 계곡 아래로 흘러내리는 빗물과 하수를 처리하기 위하여 테베레강까지 만든 커다란 배수구 시설이다. 배수구는 짐을 실은 마차가 통행할 수 있을 만큼 넓고 큼지막한데, 19세기 초 파리를 건설한 나폴레옹이 지상의 도로만큼이나 넓고 높은 하수도를 설치하여 파리 도시의 범람과 침수를 막은 원형이 되었다.
또, 매립지인 포로 로마노의 지반을 견고하게 하려고 큼지막한 돌을 촘촘히 박았는데, 그 돌은 벽돌이 아니라 가로세로 30㎝, 길이 1m가량의 기다란 석주(石柱)다. 석주로 만든 도로와 광장의 포장(?)은 이후 로마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 도시의 광장과 도로포장의 원형이 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포로 로마노가 비좁아지자, 포로 로마노 언덕 너머로 전차 경주장과 콜로세움 경기장 등을 세우는 등 도시는 점점 확대되었다. 그렇게 약 1000년 동안 로마의 심장 역할을 하던 포로 로마노는 4세기 말 서고트족의 침입으로 파괴됐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 1871년부터 발굴과 복원을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