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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경태의 문학산책] 문무 겸비한 융합형 지도자 절재 김종서

문화 칼럼니스트·문학박사

2024. 01. 08 by 금강일보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이해 문무를 겸비하고 청룡과 같이 강한 리더십과 주도적인 성향으로 매사에 용기와 도전 의식을 갖고 활력 있게 실천한 만고 충절의 상징인 절재 김종서부터 금년도 문학산책을 시작한다.

◆김종서의 생가지와 유허비

신년 들어 처음 시작하는 문학산책을 환영이라도 하듯 맹위를 떨치던 한파도 잠잠해지고 공주 천태산 남쪽 자락은 고요함 속에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축복받은 날씨였다.

초등학교를 돌아 동네 어귀로 들어서면 곧바로 김종서 생가지가 나온다. 집터로 올라가는 계단 옆으로 큰 나무 두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린 채 지난 역사를 설명하듯 서 있고 비교적 잘 정돈된 집터에는 인걸은 간데없고 안내판과 비석들만이 그 옛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생가지 한 중앙에 ‘충익공 절재 김종서 장군 행적비’가 나지막하면서도 푸른 정방형의 철조 구조물이 보호하고 있고 그 옆에 ‘김종서 유허지’ 안내판과 ‘2019년 10월 이달의 공주 역사인물 김종서’가 선정된 안내판이 있다. 또 행적비 정중앙 뒤로 또 다른 계단 위에 ‘충익공절재김종서장군유허비’가 주변 관상목의 호위를 받으며 위엄있게 서 있다.

충익공 절재 김종서 장군 행적비.
충익공 절재 김종서 장군 행적비.

조선초 명신으로 절의와 충의의 표상으로서 좌의정으로 어린 단종을 보필하다가 이른바 계유정난(1453년) 때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고 순천 김씨 가문이 멸문당한 이후 이곳은 ‘김종서 생가지’ 혹은 ‘정승의 집터’로 불려왔다. 다만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박탈하려는 목적으로 요당서원 자리에 의당초등학교를 짓고 김종서 장군의 생가터에 신사(神社)를 지어 아이들에게 강제로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하게 했다고 한다. 해방 후 이곳 생가지는 일제의 신사를 허물고 의당초등학교에서 1980년대까지 역사 교육장소로 활용해 오다가 1981년부터는 공주시에서 주변을 정리해 향토문화재자료로 선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김종서, 황보인 등을 배향했던 요당서원은 월곡리 유래비에서도 언급하고 있듯 이곳 주민들은 서원의 철폐를 무척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 공주시와 일부 종중 및 지역 언론이 뜻을 모아 요당서원 복원 운동을 펼치고 있고,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부디 좋은 결실을 보아 우리 충청의 선비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김종서 생가지의 모습. 가운데 중앙에 행적비가 있고, 뒤에 유허비가 있다.
김종서 생가지의 모습. 가운데 중앙에 행적비가 있고, 뒤에 유허비가 있다.

◆문무를 겸비한 김종서

김종서 생가지에 있는 ‘충익공 절재 김종서 장군 행적비’와 ‘충익공절재김종서장군유허비’에서 보듯 절재 김종서는 장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행적비 기록만 보더라도 장군은 조선 태종 5년(1405) 18세의 소년으로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간 뒤로 세종 성대를 만나 불후의 업적을 남겼으니 가장 위대한 일은 북경의 6진 개척이다. 세종은 평소 장군의 뛰어난 지략을 알고 함길도 병마도절제사에 임명해 동북부의 국방을 전담하게 했고, 장군은 침범하는 야인을 쳐서 멀리 두만강 밖으로 몰아내어 백성을 보호하고 강역의 요충지에 경원, 종성, 회령, 경성, 온성, 부령 등에 6진을 두어 변방을 영구히 튼튼하게 했다. 이로써 국토가 두만강까지 확대 개척돼 오늘날의 국경선이 확정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절재 김종서는 일반에서 장군, 대호로 일컫지만, 그는 5척 단신으로 무과가 아니라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었고 행정 공무원이 된 초창기에는 일이 서툴고 실수해 곤장을 맞기도 했다.

그 후 김종서가 큰 인물로 발돋움한 것은 세종 때, 강원도 지방을 감찰하고 빈민의 상황을 자세하게 보고하면서부터이다. 나아가 정확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공무를 수행해 굶주린 백성들에게 조세를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등 문제점과 대안까지 제시해 세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후 사간원 정언, 광주판관,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 등의 벼슬을 두루 거쳤고 그가 사헌부 집의로 있을 때 당대의 뜨거운 감자였던 살아있는 권력 양녕대군의 성 스캔들이 일어났고 이에 김종서는 이를 형제의 문제가 아닌 군신의 문제로 다루어 탄핵할 것을 강단 있게 여러 차례 강력히 간청해 성역 없는 수사와 법 앞에 평등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明月은 눈 속에 찬데’와 ‘長白山에 旗를 꽂고 豆滿江에 말을 씻겨’라는 두 시조가 김종서 장군 묘역에 있는 재실 숭인재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진무문 양옆에 검정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주련 하여 장군의 호국정신과 호연지기를 느끼게 한다. 

이 밖에도 절재 김종서는 당대 뛰어난 제일의 역사가로서 역사편찬 사업을 주관해 조선 개국 이래 숙원사업의 하나였던 고려시대의 역사 정리를 마무리했다. 고려사를 편찬했고 고려사절요를 완성했다. 그리고 방대한 세종실록 편수를 주관했다.

김종서 장군 역사테마공원 사업이 진행중인 모습.
김종서 장군 역사테마공원 사업이 진행중인 모습.

◆김종서의 영원한 안식처, 김종서 묘역

절재 김종서 묘역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 산 45 밤실에 있다. 이곳은 본래 공주시 장기면이었다가, 2012년 세종시에 편입되면서 장군의 묘소가 있는 곳임을 알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장군면'으로 개칭했다. 

묘역 입구 주변에 세종특별자치시 시도기념물로 지정된 사당 충익사, 삼문 충의문, 재실 숭인재, 사주문 진무문, 편문 진성문 등이 있고, 묘소로 가는 길에는 신도비와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의 충효정려 등이 있다.

특이한 것은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가 대부분 거북이 모양의 귀부인 데 반해 이곳 김종서의 신도비는 두꺼비 모양의 섬부라는 점이 이채롭다. 그것은 장군의 묘소가 있는 이 마을이 풍수지리적으로 지네 형상을 하고 있어 지네를 잡아먹고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두꺼비 모양을 했다고 한다.

한편 산의 허리를 끼고 돌로 다듬어 놓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김종서의 묘소가 나온다. 묘소에는 여타의 묘소와 달리 3개의 묘비가 있다. 좌측의 비는 최근에 건립되었고, 가운데 것은 1963년에 건립됐으며 우측의 비는 1808년(순조 8) 공주판관 이익진이 지방 선비들과 함께 건립한 것이다. 앞면에는 ‘조선좌의정절재 김선생종서묘’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김종서 사후 305년 만에 숙종 대에 단종이 추복된 사실과 세장지(世葬地)가 공주 북쪽 요당면 율동리라는 사실 그의 옷과 신발을 장사지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수양대군이 주인인 김종서를 능지처참시키자 이 광경을 보고 그가 아끼던 말이 갑자기 뛰어들어 김종서의 다리 한쪽을 물고 한양성을 뛰쳐나와 공주의 이곳까지 달려와서 죽었다고 한다. 그 말이 물고 온 한쪽 다리를 이곳에 묻었고 그 후부터 마을 이름을 ‘한다리’라 불렀으며 훗날 ‘대교리(大橋里)’로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은 2018년에 착수한 김종서 장군 묘역 역사 테마공원 조성 사업이 한창이다. 세종시 담당 공무원에게 문의한 결과 공사는 금년도 하반기에 마무리할 계획이라 한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김종서 장군 묘역은 추모와 휴식, 체험 놀이가 가능하여 가족끼리 즐기면서 김종서의 충효 정신과 호연지기를 마음껏 배우는 역사 체험 학습의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문화 칼럼니스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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