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설 연휴를 보내고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오늘은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의 문학을 산책하고자 한다. 신흠의 자는 경숙, 호는 상촌·경당·백졸·남고·현헌·상촌거사·현옹·방옹·여암 등이며 본관은 평산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 7세 고아가 다양한 독서로 조선 4대 문장가로 성장하기까지
상촌 신흠은 1566년(명종 21) 한성부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상촌은 개성도사를 지낸 아버지 신승서와 의정부 좌참찬 송기수의 둘째 딸 어머니 은진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눈동자는 샛별처럼 빛났고 이마가 넓고 귀가 컸으며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단정하고 노는 것이 범상치 않았다.
신흠은 1572년 7세에 양친을 잃고 외가에 입양되어 외조부 추파 송기수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워낙 총명하고 뛰어나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송씨 집안에 장서들이 많았는데 침식까지도 잊을 정도로 독서에 열중해 경전자사로부터 도학과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박학했다. 생전에 글재주가 뛰어나서 월사 이정구, 계곡 장유, 택당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 문장 4대가’, ‘월상계택’으로 불렸다. 또 광해군 때는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 중의 한 사람으로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김포→춘천→김포로 오가는 방축유배기를 보내기도 했으나 인조반정 후 다시 관료에 복귀해 예문관 및 홍문관의 대제학과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상촌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상촌집’ 63권에 한시 2036수, ‘청구영언’에 한글 시조 ‘방옹시여’ 30수와 ‘야언’, ‘낙민루기’ 등에 주옥같은 산문문학 작품을 남겼다.
①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지더라도 그 본래의 성질이 남아 있으며/ 버드나무는 백번 꺾이더라도 또 새로운 가지가 올라온다. -신흠, ‘야언’에서
②산촌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어라/ 싸리문을 열지 마라 날 찾을 이 뉘 있으리/ 밤중만 일편 명월이 긔 벗인가 하노라 -신흠, ‘방옹시여’ 제1수
①의 시는 신흠의 ‘야언’에 나오는 7언절구의 한시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매화를 사랑했던 퇴계 이황은 이 시의 승구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선비로서의 지조와 절개를 지키고자 하였고, 백범 김구는 달과 버드나무를 비유한 이 시의 전과 결구를 휘호로 남겨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결기를 보여 준 것으로 유명하다.
②와 연관된 ‘방옹시여’ 30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여러 차례 출제됐으며 제1수는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은둔자의 한적한 생활을 자연사와 인간사를 대비시켜 운치 있게 그려냈다.
◆ 외조부를 추모하는 한시와 다시 생각해 볼 숙제
서글퍼라 주륜 화불 자취 흔적 없는데/ 깨진 초석 무너진 담 옛 집터를 알겠구나/ 쌓은 덕에 뒷경사 넉넉함을 알 수 있고/ 끼친 영광 다행히 자손까지 미쳤네/ 전쟁을 겪는 속에 백년 사당 묵히었고/ 제물 올리는 지금 갱장 사모 깊구나/ 부끄럽네 이 내몸은 택상이 되지 못하고/ 반평생을 육아시만 헛되이 폐했다네 -신흠, ‘상촌선생집’ 제13권
이 시는 상촌이 지은 많은 작품 중 유일하게 외가를 소재로 하여 지은 칠언율시이다.
전쟁 전 ‘주륜 화불’과 같은 고관의 영화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옛 집터만 남겨져 사당을 오래 묵혔지만 그간에 쌓은 외조부의 덕으로 자자손손 풍요롭고 넉넉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련과 미련은 순임금의 갱장, 진나라 위서의 택상, 시경의 육아 고사를 예로 들어 화자는 존귀한 외손자가 되지 못했지만, 외조부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외가는 현재 추파 송기수의 묘와 그를 추모하는 사당 상곡사 등이 있는 대전시 동구 주산동 고용골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대전시사’ 1권(1992) 대덕군지, ‘대전문화’창간호(1992), 대전동구문화원 ‘신흠의 생애와 문학’(2004),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11)-대전시 항목 등은 ‘신흠이 부모상을 당하고 대전시 동구 주산동에 있던 외가에 입양돼 유소년 시절 10여 년을 여기서 보냈으므로 대전의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박해남은 ‘상촌 신흠 문학의 궤적과 의미’(2012)를 통해 신흠은 한성부 북부 장의동에서 태어나 7세에 양친을 여의고 동생인 감과 함께 외가가 있는 한성부 돈의문 밖 유점동에서 양육됐다고 주장한다. ‘국역 추파선생문집’을 근거로 신흠의 외조부인 추파 송기수는 한성 돈의문(지금의 서대문) 밖 반송방 유점동 옛집에서 아버지 판서공 송세충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조인 평산공 송사민이 개성에서 한성 반송방으로 이사했고 성종은 특별히 전교를 내려 추파의 증조인 정랑 휘 순년에게 평산공의 제사를 받들게 한 기록으로 보아 추파는 여기서 태어나 생활하고 여기에서 75세에 생을 마감했다. 따라서 신흠도 어린 시절을 한성부 외가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 본고가 추파 송기수의 연보를 상세히 고찰해 본 결과, 송기수 가는 한성에 터전을 마련하여 한성에서 주로 생활했고 은진 송씨의 세거지인 회덕에 선영과 옛집이 있었으며 그 자신은 한성에서 졸해 회덕 주산동에서 영면했다. 그리고 추파가 21세에 아버지, 45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부모를 모두 회덕에 모시고 3년씩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가끔 이곳 고향의 집을 방문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후자의 주장에 힘이 실린다.
신흠을 대전의 역사적 인물로 파악하는 문제는 이렇게 문제성을 제기하며 연구가들의 다음 숙제로 남기고, 본고는 우리 충청지역에 남겨진 신흠의 문학적 발자취를 찾아보기로 한다.
◆ 충청지역에 남긴 상촌 신흠의 문학 발자취
추파 송기수 선생 신도비 대전시 동구 주산동 산25-6에 조선시대 석조 예술품의 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은 상촌의 외조부 추파 송기수의 묘역(대전시기념물 제47호)이 있다. 묘역에는 추파 송기수 부부의 묘소와 신도비를 비롯한 각종 석물이 즐비하게 펼쳐있고, 부부의 묘소 아래에는 아들 송응개의 묘소가 있으며 가까운 인근에 추파를 모시는 사당 상곡사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조선 4대 문장가로 일컬어지는 외손자 상촌 신흠이 짓고 근곡 이관징이 추파의 업적을 새긴 신도비이다.
‘상고해 보건대’로 시작해 ‘영원히 남겨지게 하도다’로 끝나는 추파의 신도비는 서문, 가계와 관력, 자손, 행실과 이력, 용모, 교유 인사, 영향 등을 유려한 필체로 총총히 정성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대전 최초의 사액서원 숭현서원 묘정비 신흠의 흔적이 남아 있는 숭현서원은 회덕의 팔현을 모셔서 ‘팔현묘’로도 불리는 대전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대전시 유성구 원촌동 산 35-1에 위치한다.
숭현서원 앞에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상촌 신흠이 짓고 우암 송시열이 덧붙인 내용을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고 하는 이 묘정비를 근거로 1994년에 유적 발굴조사를 해서 숭현서원 터를 확인하고 복원했다. 현재 묘정비는 2001년에 모사해 놓은 것이고 진품은 대전시립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숭현서원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다 보니 묘정비의 글을 만지거나 떼어가서 자녀들의 시험 합격을 비는 일이 많아져 훼손이 심해졌다고 한다.
공주 공산성 쌍수정 사적비 공주 공산성에 있는 쌍수정 사적비는 1708년(숙종 34)에 관찰사 이선부가 세운 비석으로, 조선 16대 왕인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과 공산성에 대한 수축 및 찬양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을 썼으며, 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됐다. 인조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두 그루의 나무에 기대고 앉아 난이 진압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진압된 후 돌아갈 때 인조는 기대고 앉아 있었던 두 그루의 나무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이때부터 공산성은 쌍수산성으로 불렀고 1734년(영조 10)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던 곳에 정자를 세워 쌍수정이라 했다.
<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