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자유는 그저 남의 것이었을지 모른다.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중심에는 학생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학생 주축의 민주화운동으로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대구 2·28민주운동, 대전 3·8민주의거, 마산 3·15의거는 그래서 민주화의 흐름 속 빼놓을 수 없는 역사다. 제64주년 대전 3·8민주의거 기념일을 앞두고 이영조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부위원장을 만났다.
◆ 국가기념일 지정, 그러나…
대전 3·8민주의거는 규모도 큰 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었다. 학생들이 주도하고 시민들이 힘을 보탰다. 대구 2·28민주운동, 마산 3·15의거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였던 대전 3·8민주의거는 4·19혁명의 중요한 고비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대전 3·8민주의거는 오늘에 와서야 그 존재가 알려지고 있는 처지다. 특히 그날의 현장인 대전에서조차 아직은 존재감이 미미하다는 건 영 달갑지 않은 현실이다. 대전 3·8민주의거는 그날로부터 오늘까지 왜 외면받았던 걸까. 당시 학생들의 장래를 우려한 교사들의 염려 때문이었다는 게 이 부위원장의 설명이다.
“대전 3·8민주의거 때 학생들의 미래를 걱정한 선생님들이 언론을 막았다고 해요. 특히 대전상고는 취업을 목적으로 한 학생들이 많았는데 당시 사건은 반정부 시위였으니 여기에 참여한 이들에겐 치명타가 됐겠죠. 그래서 학생들의 장래를 위해 최소한의 보도만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주된 정보매체였던 신문기사로도 보도되지 않았으니 현재 남겨진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 지금이라도 대전의 정신으로
감춰진 진실이 그나마 드러나게 된 건 40년이 흐른 2000년대 초에 와서다. 대전 3·8민주의거 당시 고등학생으로 실상을 목격한 언론인들 덕분에 가능했단다. 무엇보다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가 조직되면서 다큐멘터리와 단편영화 제작, 무용극, 백일장, 시낭송회 등 계승 사업의 토대가 놓일 수 있었다. 특히 올 10월 초엔 3·8민주의거기념관이 문을 열어 대전의 그날을 기억할 거점을 완성하게 된다.
“기념관에는 대전 3·8민주의거 루트와 시위계획, 방식 등 구체적인 배경과 현장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입체적 공간을 구성하려 합니다. 더 나아가 세계혁명사를 돌아보고 그 속에서 대전 3·8민주의거가 갖는 의미도 선보이려고 해요.”
대전 3·8민주의거는 각고의 노력 끝에 지난 2019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충청권의 숙원이었던 대전 3·8민주의거의 국가기념일 지정은 당대 역사를 써내려간 세대들이 발로 뛰어 이뤄낸 결과물이다. 어느덧 이들의 평균 연령은 80세를 넘어섰다. 이제 후세대가 그들의 뜻을 이어받아 대전 3·8민주의거의 정신을 계승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고령에 접어든 대전 3·8민주의거 참여세대는 앞으로의 역사를 이끌기엔 한계가 있어요. 우리가 관심 갖지 않으면 그날이 역사도 지워질지 모르죠. 대전시의 구성원 전체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형의 대전 3·8민주의거가 기념관 건립으로 가시화되는 만큼 부디 그날의 항거가 시민의 정신으로 자리 잡길 소망합니다.”
글·사진=김고운 기자 kgw@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