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벚꽃엔딩’이 귓가를 떠나지 않고 맴돈다. 워낙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 언제부턴가 이 노래가 들려야 비로소 완연한 봄을 체감하게 된다. 기나긴 겨울을 지나 두꺼운 겉옷을 벗어던지고 한층 홀가분한 차림으로 봄바람을 음미할 시간이다. 대청호의 너른 품에도 봄이 내려앉았다. 푸른 하늘빛을 머금은 호수는 잔잔하게 일렁이고 수줍게 피어난 연약한 연분홍 벚꽃잎도 봄바람에 하늘거린다. 오랜 기다림, 봄바람이 실어다 준 이 설렘을 지긋이 눈감고 대청호오백리길에서 천천히, 그리고 실컷 누려본다.
#. 기다림의 끝엔 황홀함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벚꽃은 애간장을 녹였다. 지난해엔 말도 안 되게 일찍 꽃망울을 터트리더니 올해는 일주일이나 뜸을 들였다. 2월에만 해도 봄꽃을 일찍 만나려니 했다. 겨울 같지 않게 날씨가 포근했다. 그런데 3월이 문제였다. 꽃샘추위가 예년보다 더 심술을 부렸다. 봄꽃 축제를 준비해온 전국 많은 지자체 관계자들이 노심초사했다. 축제기간에 꽃이 만개하지 않으면 봄꽃을 주제로 한 축제의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이다.
올해도 역시 대전 동구의 ‘세상에서 가장 긴 오동선 벚꽃길’ 축제는 실기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벚꽃이 축제기간에 피지 못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지방기상청에 따르면 대전지역 벚꽃(대전기상청 내 관측표준목 기준)은 지난 3월 30일 개화해 4월 2일 만개했다. 올해 개화시점은 지난해(3월 22일)보다는 8일 늦었고 평년 평균(4월 4일)에 비해서는 5일 빨랐다. 만발은 지난해(3월 27일)보다 6일 느리고 평년(4월 5일)보다는 3일 빨랐다. 참고로 지난해 대전지역 벚꽃 개화 시점은 관측 이래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전년(2022년)보단 11일, 평년보단 13일이나 빨랐다. 어쨌든 그래도 기다림이 컸던 만큼 벚꽃을 영접하는 설렘과 그 황홀함은 훨씬 더 증폭돼 다가왔다.
#. 대청호 봄의 백미 ‘오동선’
대청호오백리길 구간 중 벚꽃로드의 끝판왕을 뽑으라면 십중팔구 ‘오동선 벚꽃길’을 꼽는다. 가장 길고 예쁘다. 드라이브를 해도 좋고 걸어도 좋다. 봄이 되면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 자체가 벚꽃길이고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할 정도로 신비로움을 선사한다.
오동선 벚꽃길은 공식적으로 지방도 571호선, 회남로를 말한다. 본래 대전시 동구 신상동 세천삼거리에서 국도 4호선과 분기해 충북 보은군 회인면 눌곡리에서 국도 25호선과 만나면서 끝나는 지방도였다. 그래서 ‘대전∼회인선’으로 불렸다. 거리는 약 26.6㎞다. 그러다 대전 동구가 자체적인 벚꽃축제를 위해 충북의 지명인 ‘회인’ 대신 대전 동구의 ‘오동’을 따서 이 길을 ‘오동선’으로 명명했다. 임의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니 검색포털 지도검색에선 잘 검색되지 않지만 워낙 벚꽃길로 유명세를 타 관련 정보가 넘쳐나니 이 점 참고하면 되겠다.
오동선 벚꽃길은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이라는 타이틀로 오랜 기간 알려지면서 그냥 ‘세계 최장 벚꽃길’로 자리매김 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현재로선 믿거나 말거나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진 않는다. 다만 오동선 벚꽃길은 이 세상 모든 벚꽃로드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황홀한 경험을 선사하니 이 지점에서 ‘최장 벚꽃길’에 대한 의심은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되고 만다.
#. 벚꽃한터~방축골
다시 걷기 좋은 계절, 대청호오백리길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벚꽃이며 개나리며 진달래며 민들레며, 봄을 기다려온 다른 친구들이 이미 와 있으니 어서 오라 재촉한다. 팝콘 닮은 조팝나무꽃, 진분홍 명자나무꽃, 어지간해선 보기 힘든 박태기나무꽃까지 대청호오백리길에 많이도 모였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에도 신록이 돋아나며 숲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바짝 움츠렸던 대청호도 비로소 다시 기지개를 켜며 활기찬 한 해의 시작을 준비한다.
대전시 동구 신상동 벚꽃한터. ‘안아감’, ‘바깥아감’, 이름도 정겨운 이 마을에서 ‘오동선 벚꽃길로드’의 여정을 시작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열리는 벚꽃축제 때문인지 수년에 걸쳐 이곳은 잘 다듬어진 쉼터, 그 이상의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감성을 자극하는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잘 갖춰졌다. 관광지로서도 손색이 없다. 호수와 접해 새로운 덱(deck)길이 생겼는데 여기는 돌아오는 길에 만나보기로 한다.
일단 충북 보은 방면으로 길을 잡는다. 원래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은 흥진마을을 한바퀴 크게 돌아나와 백골산에 오른 뒤 절골로 하산해 방축골로 진입하는 코스로 이뤄져 있는데 벚꽃을 감상해야 하니 절골까지 도로를 따라 나 있는 덱길로 걷는다.
길 양 옆에 식재된 벚나무들이 부쩍 자라 벚꽃이 터널을 이뤘다. 군데군데 하늘을 가릴 정도로 벚꽃이 풍성하게 매달렸다. 만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다소 강한 봄바람에도 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제법 끈기있게 버틴다. 그래봐야 10일 정도? 벚꽃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이맘때면 먼 길을 달려 이곳을 찾는데 정작 마을사람들은 벚꽃보단 벚꽃을 보러 찾아온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많다. 상춘객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벚꽃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남기느라 여념이 없는데 정류소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마을 어르신들은 그런 사람들 얘기에 분주하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붙들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덱길을 걷다보면 간간이 대청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비금부락을 지나 끝없이 이어지는 벚꽃터널로 계속 빠져든다. 신절골 버스정류소를 거쳐 구절골까지 벚꽃의 향연을 즐긴다. 계속가면 충북 보은 회남까지 벚꽃을 즐길 수 있다. 구절골에서 방축골로 들어선다. 방축골 초입, 절골식당 민물새우탕이 유혹하지만 이번엔 다른 메뉴를 머릿속에 담아놓고 절골식당을 지나친다.
방축골은 사시사철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의 핫플레이스지만 특히 봄의 유혹은 뿌리칠 수가 없다. 사람들이 방축골로 몰리는 건 팡시온, 라끄블루, 롤라 등 전망 좋은 곳에 카페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인데 봄꽃과 어우러진 대청호의 풍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굳이 카페가 아니라도 좋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정자에 편히 앉아 대청호에 떠 있는 듯 한 돌탑섬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친 삶에 찌든 심신이 저절로 치유되는 힐링의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방축골이 간직한 대청호의 풍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다.
#. 5구간의 새로운 둘레길
방축골에 발을 들여놓으면 어지간해선 발길을 되돌리기 어렵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청호의 새로운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고 또 보고 어느정도 익숙해져야 발길을 뗄 수 있다.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 한껏 여유를 만끽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아쉬운 마음에 뒤돌아보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다. 방축골을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오동선 벚꽃길이 파노라마처럼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벚꽃터널에 몸을 맡기고 화려한 봄날의 여유를 하염없이, 즐길대로 즐긴다.
되돌아오는 길, 다시 충암 김정 선생 묘역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 주변에 새롭게 숲길이 생겼다. 길로 접어들자 도로의 엔진 소음에서 벗어난다. 울창한 소나무숲, 이곳은 또 다른 세상이다. 벚꽃에 사로잡혀 화려해졌던 머릿속이 금세 차분해진다. 숲내음이 강하게 밀려들어온다. 수변 전망대와 덱길도 조성됐다. 대청호 트레킹의 진정한 묘미가 이제야 상기된다. 벚꽃에 취했다가 깬 느낌이랄까?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오동선 벚꽃길의 또 다른 매력도 발견하게 된다. 대청호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니 금상첨화다.
숲길을 돌아나오면 벚꽃한터와 만난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뭔가 아쉽다. 꽤나 걸은 것 같은 데 10㎞가 채 안 된다. 물론 대청호오백리길엔 선택지가 많다. 그중 하나, 바로 흥진마을 둘레길이다. 원래 5구간에 포함된 길이다.
지난 겨울 이례적으로 비가 많이 내린 모양이다. 최근 10년 새 대청호 수위가 이렇게 높았던 적이 없다. 9년 전, 그리고 이따금 가물었을 땐 마을 주변 호수가 바닥을 드러내 가을, 겨울이면 억새가 무성하게 자라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하기도 했다. 수몰 전 마을 우물터도 모습을 드러내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랬던 모습들이 다시 다 물에 잠겼다. 호수의 크기 역시 몰라보게 커졌다. 물이 많든 적든 이 흥진마을 둘레길은 산책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을 가졌다. 전망 좋은 곳 벤치에 앉아 평화로운 대청호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진정한 쉼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대청호오백리길에 한 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가기가 힘들다. 사시사철, 언제나.
글=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차철호‧김동직 기자